신화나 꿈은 집단적 무의식의 표현이다. 카를 융의 말인데 변산반도의 개양(開洋)할미 신화도 거기에 부합된다. 바다가 삶의 터전인 사람들의 무의식이 개양할미를 만들어냈다. 누군가로부터 보호받고 싶은 무의식.
바다는 풍요롭지만 늘 위험한 곳이었다. 사람들은 신화에 기대기라도 해야 살 수 있었다. 그래서 빌었다. 바다에 나갈 때는 보호해달라고, 돌아올 때는 무사히 돌아오게 해줘서 고맙다고 빌었다. 그들의 삶은 절박한 염원과 기도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보호받고 싶은 절박한 마음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신화가 만들어졌다.
개양할미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몸집이 크고 키도 크다. 그래서 굽이 있는 나막신을 신고 아무렇지도 않게 바다를 걸어 다닌다. 바닷물은 발등까지밖에 차지 않는다. 그는 바다를 돌아다니며 바닥을 평평하게 고르고 풍랑을 잠재운다. 배가 조난을 당하면 휘적휘적 들어가서 구해준다. 이런 존재의 품에서 살면 얼마나 든든할까.
개양할미는 그곳에 터를 잡고 사람들을 대대손손 보호해줬다. 그런데 그의 집이 훼손되고 있다. 유채꽃 같은 화려한 꽃들을 심겠다고 조릿대 숲을 베어버린 거다. 그래서 그곳은 죽막이 사라진 죽막동이 되고 말았다. 천연기념물인 후박나무들도 바람을 막아주던 죽막이 사라지자 죽거나 파리해졌다. 훼손된 것이 어디 그것뿐인가. 개양할미가 여덟 딸을 낳았다는 여울굴, 현란하게 아름다운 그 해식(海蝕)동굴에는 쓰레기가 나뒹군다. 이 나라에서 이것이 어찌 죽막동만의 문제이랴. 이따금 우리는 그렇게 신화의 장소에 상처를 낸다. 신화를 거시적으로 보는 눈이 필요한 이유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