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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햇살에 빛나는 강아지 풀의 환희… 낙안읍성 돌담길 산책 [전승훈의 아트로드]

입력 | 2022-10-26 11:00:00

순천 낙안읍성




낙안읍성은 1397년 전라좌수사 김빈길 장군이 처음으로 토성을 쌓았다가 1626년 낙안군수 임경업 장군이 자연석으로 성을 고쳐 쌓았다. 둘레 1.4km의 성벽 위를 한 바퀴 돌며 마을을 구경할 수 있다.



《골목길 감나무마다 빨간 감들이 주렁주렁 익어가는 전남 순천 낙안읍성 마을. 고려 때부터 ‘즐거울 락(樂)’, ‘편안할 안(安)’ 자를 써서 낙안군이라 불린 곳이다. 과연 주변 산들에 에워싸인 이곳은 오래도록 살 만한 곳으로 평온함이 느껴지는 벌판이다. 조선시대로 돌아간 듯한 성 안의 초가집에는 아직도 주민들이 살고 있다. 한바탕 가을 축제도 열린다.》 

빨갛게 열매가 익어가는 낙안읍성의 감나무.

○ 사람이 살고 있는 읍성
 읍성에 들어서면 전래 동화나라에 온 듯하다. 초가지붕에는 흥부놀부전에 나올 법한 박이 매달려 있고, 나뭇가지로 엮은 사립문 너머로 집 마당이 훤히 보인다. 높이 4m, 총길이 1.4km에 이르는 성벽 위를 돌다 보면 텃밭에서 배추와 고추를 키우고 있는 주민들이 보인다. 대장간에는 시뻘건 불꽃이 이글거리고, 고샅(좁은 골목길)에는 코스모스가 한창이다. 

낙안읍성 마을 초가집의 장독대 항아리.


낙안읍성 마을이 여느 민속촌과 다른 점은 실제로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88가구 175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초가집 중에는 도예공방, 천연염색, 서각, 대금, 가야금 등을 체험할 수 있는 집도 있다. 


70, 80대 전통 초가집 기능인들이 젊은 후계자 양성을 위해 세운 마을 안 ‘향토학교’에서는 짚으로 이엉(날개)과 용마름을 엮는 작업에 바쁘다. 

 



조선 태조 6년(1397년) 낙안 출신 전라좌수사 김빈길 장군이 처음으로 낙안에 토성을 쌓았다고 하니, 읍성 마을에는 오래된 나무가 많다. 그중에 이순신 장군과 인연을 맺은 나무도 있다.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낙안읍성 객사에 머물면서 심었다는 푸조나무.


백의종군했다가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 장군이 병력과 군량미를 모으기 위해 낙안읍성 객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당시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장군이 심은 푸조나무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
 


  또 하나는 수령 600년이 넘은 은행나무다. 이 장군이 마을을 떠날 때 이 은행나무 앞에서 마차 바퀴가 빠져서 수리를 하느라 출발이 지체됐다. 그런데 얼마 안 가 다리가 끊어져 있더란다. 주민들에게 물어보니 조금 전에 다리가 갑자기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렸다는 것. 만일 은행나무 앞에서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면 장군과 병사, 군량미까지 큰 피해를 볼 뻔했던 터라 마을 사람들은 목신(木神)이 조화를 부린 것이라고 믿었다. 


낙안읍성에서 지난 21~23일 민속문화 마을축제가 열렸다. 코로나19로 중단됐다가 3년 만에 다시 열리는 축제다. 대표적인 프로그램은 주민들이 21,23일 직접 공연한 ‘낙안읍성 백중놀이’와 ‘낙안읍성 성곽 쌓기’다.


행사 전 기자가 찾아갔을 때에도 마을 주민들이 객사 옆 넓은 공터에서 ‘백중놀이’를 연습하고 있었다. 장구와 북, 꽹과리를 들고 나온 주민들이 흥겨운 가락을 연주했다. 청년들이 들돌 들기, 씨름, 진세놀이, 성벽 쌓기, 덕석기(용을 그려넣은 커다란 깃발) 뺏기 놀이를 하면서 힘을 겨루고 대동단결을 하는 축제다. 

송갑득 낙안읍성 명예별감. 


“음력으로 7월 보름날이 백중입니다. 벼농사에서 모심고, 가꾸는 힘든 일은 거의 끝나고 가을에 수확만 기다리면 되는 시기죠. 그래서 호미를 물에 씻어 걸어두고 하루 흥겹게 노는 ‘호미 시침’ 날입니다. 밀양 백중놀이는 ‘북춤’으로 유명한데, 낙안읍성 백중놀이는 커다란 덕석기(용 모양 깃발)를 뺏는 ‘덕석기 놀이’로 이름이 나 있죠. 20년 전부터 마을 주민들이 직접 연습해서 재현하고 있습니다.”(송갑득 명예별감·67)

 


축제 기간 중 전통 혼례식에는 다문화 부부 등 그동안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순천시 커플들의 실제 결혼식이 열렸다. 

   
○ 초가집에서의 하룻밤


낙안읍성 가을축제의 또 다른 명물은 바로 주민들이 직접 만들어 파는 향토음식이다. 전국의 축제장 풍경을 똑같이 만들어버리는 ‘각설이’ ‘품바’ 공연과 천막에서 파는 파전, 막걸리와는 다르다. 낙안읍성에서는 인근 밭에서 수확한 채소와 순천만과 벌교에서 나는 꼬막, 짱뚱어탕 등 주민들의 손맛이 들어간 현지식 메뉴를 맛볼 수 있다.


3년 만에 재개되는 낙안읍성민속문화축제에는 ‘창극 김빈길 장군’ 공연과 가야금 병창, 동편제 소리, 남사당놀이, 국악과 재즈 공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됐다. 남정숙 총감독은 “성벽 쌓기는 낙안읍성 마을에서만 볼 수 있는 전통놀이”라며 “실제 마을 주민들이 참여하는 살아 있는 축제”라고 말했다. 2019년에도 축제 감독을 했던 그는 낙안읍성 마을에서 여행객들이 초가집에서 숙박하며 전통을 체험하는 체류형 민속문화마을로 변신시켰다. 


실제로 읍성마을에는 ‘은행나무 민박’ ‘연못 민박’ ‘별감 민박’ 등 소박하고 예쁜 이름의 민박집이 많다. 돌담길을 걷다 보니 어느덧 해가 졌다. 오후 6시인데 마을은 삽시간에 고요해진다. 어둑어둑해진 골목길에는 가을 저녁 풀벌레 소리만 가득하다. 도시의 번쩍이는 네온사인도, 자동차의 소음도 없는 성 안에선 이따금 개만 컹컹 짖을 뿐이다. 마을 뒤편 금전산 너머로 별빛을 보다가 잠이 들었다. 


오전 6시 반. “주민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라는 확성기 소리에 잠을 깼다. 1970, 80년대 시골마을에서 들을 수 있었던, 이장님이 직접 마을 소식을 전하는 마이크 소리다. 동이 터오는 창호지 문 밖으로 벌써부터 분주하게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주인댁 어르신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해질 녘 노을빛에 물든 초가지붕은 뭔가 애잔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는데, 반짝이는 이슬이 맺힌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 돌담길 골목은 아이유의 ‘가을 아침’ 노래처럼 청명하다. 낙안읍성의 고즈넉함을 즐기고 싶다면 관광객이 많은 주말이 아니라 평일에 초가집 민박에서 하루 이틀 밤 자고 가기를 권한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