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엔화 가치의 추락을 막기 위해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팔고 엔화를 사들이는 환율조정에 나섰지만, 일본 내에서는 “환율 개입이 먹히지 않는다”, “환율 개입은 엔화 약세를 막을 수 없는 것 아닌가”라는 비관론이 커지고 있다. 일본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 엔화 가치를 일시적으로 끌어올릴 순 있지만, 달러 수급의 두터운 벽을 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26일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 비즈니스인사이더재팬에 따르면 미·일간의 금리차 확대를 바탕으로, 약 32년만의 엔 하락·달러 상승이 진행되는 가운데, 일본정부·일본은행은 잇따라 과거 최대 규모의 엔 매수·달러 매도 개입을 실시했다.
하지만 정부가 개입해 엔화 가치를 끌어올리려고 해도 시장에서 엔화 매도 주문이 나오면서 엔화 약세 기조에 좀처럼 제동을 걸지 못하고 있다. 엔고(円高)를 막고 있는 배후에는, 거액의 무역 적자와 맞물려 일본 내 달러화에 대한 높은 수요로 인한 엔화 매도 흐름이 간과할 수 없다. 엔화가 넘을 수 없는 두터운 ‘달러의 벽’이 존재하는 셈이다.
비즈니스인사이더재팬은 21일 당시 5조엔 규모의 엔화 매수 및 달러 매도가 이뤄진 것으로 추정했다. 24일에도 149엔대 후반에서 145엔대까지 치솟는 장면이 있어, 이쪽도 환율 개입 가능성이 보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엔화 약세 기조가 반전을 맞는 가격변동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투기에 의한 과도한 변동은 용인할 수 없다”고 했고, 스즈키 슌이치 재무상은 “지금 우리는 시장을 통해서 투기꾼과 엄격하게 대치하고 있다”고 했다.
일본 정부가 ‘투기(投機)’라는 말에 집착하는 것은, 엔 매수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헤지펀드 등의 투기적인 엔 매도로 엔화 환율시세의 변동이 인위적으로 왜곡되어 있다는 인식의 공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닛케이는 분석했다.
“하지만 시장의 뒤통수를 치는 정부의 개입은 엔화 약세를 막기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겠다는 헤지펀드와 같은 인위적인 환율조작을 연상시킨다”고 닛케이가 지적했다. 외환시장 참가자들이 일본정부·중앙은행의 이런 개입 수법에 혐오감을 갖는 것은, 현재의 시세가 미·일 경제 상황의 차이를 보여주는 ‘엔저’ 국면이라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JP모건체이스의 한 관계자는 닛케이에 “2022년 일본의 무역적자는 사상 최대인 20조엔 규모에 달하지 않을까”라고 예상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에 따른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자원 수입에 의존하는 일본의 무역적자는 실제로 전례없는 규모로 커지고 있다.
반면 일본 기업의 생산거점 해외 이전이 확대되면서 엔화 약세에서 우위를 점해야 할 수출 확대는 탄력을 받지 못하고 있다. 헤지펀드의 엔화 매도가 이익확정의 엔화 환매를 수반하는 데 반해 수입기업의 엔화 매도는 엔화 환매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엔화 환율이 현재와 같은 1달러=150엔 정도를 기록한 1990년 당시 일본의 무역흑자는 7조엔을 넘었다. 2022년에는 상반기에만 7조엔이 넘는 적자를 나타내고 있다. 수입대금을 위해 달러를 조달하는 일본 기업은 헤지펀드 같은 순간적인 엔화 매도·달러 매수에 움직일 수 없는 반면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으로 엔화가 강세를 보인 뒤에는 확실히 엔화 매도·달러 매수 주문을 넣는다.
미즈호 은행 관계자는 닛케이에 “엔화 약세 진행에 확실하게 제동을 걸려면 일본 경제의 무역적자 구조를 전환시킬 필요가 있지만 큰 폭의 엔저 국면만으로는 일본 기업의 국내 생산 회귀를 촉구하기 어렵다”며 “저출산 고령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국내의 노동력 확보에도 불안이 남아있다”고 진단했다.
2022년도 상반기(4~9월) 일본의 무역적자는 11조75억엔으로 현행 통계로 비교 가능한 1979년도 이후 반기 중 최대 적자폭을 기록했다. 종래 최대 적자폭은 2013년도 하반기의 8.8조엔이었다.
수입액으로 보면 전년 동기 대비 44.5% 증가했고, 증가율의 절반(23.5% 증가) 가량은 석유·천연가스 등 광물성 연료 수입이 늘어난 결과다. 또한 광물성 연료는 수입 총액의 30% 정도(29.2%)를 차지한다.
더 세밀하게 살펴보면 광물성 연료의 최대 항목인 원유 및 조유(粗油)는 수입 ‘양’으로 보면 전년 동기 대비 10.4% 증가에 그쳤지만, 수입 ‘액’은 같은기간 대비 111.8% 증가하며 10배 가까운 격차가 있다.
비즈니스인사이더재팬은 “이를 통해 수입량이 크게 증가한 것이 아니라 수입가격이 일시적으로 급등하는 바람에 무역적자가 커졌음을 알 수 있다”며 “24일 재무성에서 환율정책을 총괄하는 재무관이 무역수지의 악화를 시정하기 위해 에너지의 다양화가 필요하다고 코멘트했는데, 바로 그것이 문제의 핵심이며, 거기에 파고들지 않는 한, 엔화 매도 압력을 근본적으로 거두어들일 수는 없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한 대기업 임원은 “현재의 해외 생산 체제는 2011년의 동일본 대지진으로부터 10년에 걸쳐 구축되었다. 원래대로 되돌리는 데도 10년이 걸린다”며 결국 엔화 약세에 본격적인 제동을 걸려면 미 연준이 금리인상 정책을 끝내고 미·일 금리차가 축소되는 국면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 않겠냐고 말했다.
[서울=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