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이 언덕길 진짜 많이 뛰었는데 이제 다시 못 뛰겠네.”
20년간 집보다 더 오래 생활한 삼성트레이닝센터(STC)에서 짐을 챙겨 나오던 날 ‘미스터 고릴라’ 고희진 전 삼성화재 블루팡스 감독은 운전석 창밖으로 센터를 한 바퀴 둘러보며 이렇게 말했다. 2003년 선수로 시작한 ‘삼성맨’ 생활은 ‘감독 재계약은 어렵겠다’는 문자메시지 한 통과 함께 20년 만에 끝이 났다.
고 전 감독이 조수석에 앉아 있던 아내가 계속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그다음 신호등에 걸린 뒤였다. 고 전 감독 눈에도 눈물이 한가득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부부 사이엔 아무 말도 없었다.
고 전 감독은 2012년 11월 한국배구연맹(KOVO) 총재 취임식에 삼성화재 선수 대표로 참석했다. 취임식이 끝나고 점식 식사로 이어지던 순간 그는 ‘다음 날 경기가 있어 훈련하러 가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대팀 선수 대표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있었다. ‘공식 행사에 참석한 건데 늦어도 되지 않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이런 이유로 늦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솔직히 처음 입단했을 때는 너무 힘들었다. 나도 사람인데 친구들과 만나 술 한잔하면서 쉬고 싶을 때도 있다. 그래도 참는다. 하고 싶은 것 다하면서 어떻게 남들과 다를 수 있나. 선수로 뛰면서 운동만 생각했다. 그 덕에 배구만 한 (경남) 남해 출신 촌놈이 이만큼 살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는 또 이벤트 대회 성격인 ‘한일 V리그 톱매치’ 일정이 남아 있다는 이유로 우승 축하연 자리에서 탄산음료 한 잔도 입에 대지 않았다. 삼성화재 선수라고 모두 그랬던 건 아니다. 일부는 선수단 관리에 엄격했던 신치용 전 감독 눈을 피해 맥주 한두 잔 정도는 홀짝홀짝 들이켜기도 했다.
그랬으니 ‘왕조’에서 ‘동네북’으로 전락한 삼성화재가 은퇴 후 팀 코치로 있던 그에게 지휘봉을 맡기면서 ‘삼성화재 정신을 부활시킬 적임자’라고 설명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자부 7개 팀 중 7위, 6위에 그치면서 그는 2년 만에 지휘봉을 내려놓아야 했다.
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