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20세기 소녀’에서 1999년 운호(변우석·왼쪽)가 보라(김유정)의 다리에 붕대를 감아주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넷플릭스 제공
손효주 문화부 기자
21일 공개돼 세계 5위에 오른 넷플릭스 영화 ‘20세기 소녀’는 매의 눈으로 보지 않아도 빈틈이 보인다. 클리셰는 거의 모든 장면에 있다. 전개 방향도 훤히 보인다. 반전도 쉽게 맞힐 수 있는 수준. 영화 속 1999년은 여러 번 윤색된 끝에 순정만화처럼 미화돼 있다. 어떤 면에선 ‘레트로 판타지’ 같다. 그런데 밉지가 않다.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대 뜯어보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가도 수그러든다.
레트로를 표방한 이 영화는 1983년생 보라(한효주)가 1999년을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고1 소녀 보라(김유정)는 절친 연두(노윤서)가 첫눈에 반한 같은 학교 남학생 현진(박정우)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해 연두에게 매일 e메일로 보낸다. 심장수술을 위해 미국으로 떠난 연두가 현진을 볼 수 없다며 아쉬워하자 ‘첫사랑 동태 보고’를 시작한 것. 현진을 집중 관찰하다 보라는 현진의 절친 운호(변우석)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곧 연두가 돌아오고, 보라는 뭔가 일이 잘못됐음을 알게 된다.
영화는 한국 영화 ‘연애소설’(2002년)은 물론 일본 영화 ‘러브레터’(1999년), 대만 영화 ‘나의 소녀시대’(2016년) 등 아시아의 유명 청춘 로맨스물을 재조합한 듯하다. ‘응답하라’ 시리즈, ‘스물다섯 스물하나’(2022년) 등 레트로 드라마 대표작과도 겹치는 부분이 많다.
그럼에도 이 영화엔 마치 자신의 시절이 실제 그랬던 것처럼 문제가 될 만한 요소들을 너그럽게 수용해 가며 계속 보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세부 장치가 대표적. ‘1010235’(열렬히 사모) 등 암호 같은 번호를 상대방 삐삐에 보내 마음을 전하는 장면은 삐삐 세대의 기억을 일깨워 몰입을 이끈다. 20대 이하 세대의 전유물로 여겨진 하이틴 로맨스물에 90년대가 더해지면서 40대, 50대도 영화를 즐기게 된다. 대중문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90년대를 낭만의 시대로 여기며 동경하는 20대 이하 세대와 그 시절을 겪은 30∼50대가 공유할 영화가 오랜만에 나온 것. 보라가 공중전화로 통화할 때 중간중간 들리는 동전 떨어지는 소리는 동전이 모자라 애태웠던 기억을 소환한다. 주인공들이 e메일 도입 초창기 처음 계정을 만드는 장면은 당시 허세 가득한 아이디로 메일 주소를 만들었다가 마흔이 넘어서까지 아이디에 발목 잡힌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미숙 이정재 주연의 영화 ‘정사’(1998년) 비디오 케이스, 여학생들이 머리를 묶던 ‘곱창 밴드’ 등 추억의 아이템이 잊을 만하면 등장한다. ‘추억팔이’라 해도 속속 모습을 드러내는 아련한 추억을 외면하기란 쉽지 않다.
클리셰도 해명의 여지가 없지 않다. 방송반, 삼각관계는 그간 첫사랑을 다룬 콘텐츠에서 대중이 선호해 온 설정으로 입증된 것. 이런 클리셰를 배제하고 완전히 새로운 첫사랑 서사를 만드는 건 대중의 욕망에 배치돼 상업성을 잃을 수 있다. 다만 그렇다고 클리셰를 한가득 끌어올 것까지야 있었느냐는 아쉬움은 남지만 말이다.
영화는 과거의 아련함과 학창시절 청량감을 표현하기 위한 색감 보정 등 영상미에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가장 예쁜 색으로 보정된 과거는 유토피아 같다. 탄탄한 스토리나 치밀한 연출보다 예쁘게 보이는 것에 치중했다는 비판이 일부에서 나오는 이유다. 그러나 대중이 레트로 영화에 원하는 건 과거를 날것 그대로 살려내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현재는 고통스럽고 미래는 두려운 만큼 과거라도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모습으로 보정하고, 그곳에 의지해야 살아갈 힘이 생긴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다. 이 영화가 곳곳의 빈틈에도 세계 5위를 기록한 건 대중의 이 같은 ‘레트로토피아’에 대한 열망을 잘 읽어내서가 아닐까.
손효주 문화부 기자 hjs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