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 사거리에서 직장인들이 출근하고 있다. 뉴시스
15일 SK C&C 판교 데이터센터 화재 여파로 ‘국민 메신저’ 카카오톡을 비롯해 카카오페이, 카카오모빌리티 등 카카오 서비스가 먹통이 됐다. 카카오 차원에서는 ‘비상사태’였지만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앱 ‘블라인드’에 카카오 직원 A 씨의 글이 올라왔다.
“나라 구하는 보람으로 하는 일도 아니고 오너도 자본주의를 좋아한다는데, 책임감 같은 거 가질 필요 없지 않나? 장애 대응 보상 가이드라인이 무급 맞다길래 쿨하게 노는 중.”
이를 둘러싸고 직장인 사이에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한편에서는 “저런 무책임한 직원 때문에 회사 망한다”고 A 씨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나오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저게 현명한 태도다. 요새 2030의 생각을 대변한 것”이라는 옹호가 나왔다. 한국에서도 올 여름 미국을 휩쓸었던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 바람이 불고 있다.
● 미국 ‘조용한 사직’ 열풍…대응하는 ‘조용한 해고’도
‘조용한 사직’은 실제 퇴사를 하진 않지만 마음은 일터에서 떠나 최소한의 업무만 처리하는 태도를 뜻하는 신조어다. 지난 7월 미국 뉴욕의 20대 엔지니어 자이들 펠린이 소셜미디어 틱톡에서 사용하며 유행하기 시작했다.
해당 영상은 30일 기준 약 350만 회 이상 조회되고 49만5000회의 공감을 받았다. 직장에 마음을 두지 않고 최소한의 업무만 한다는 이 신조어는 2030 직장인들이 ‘#조용한사직’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들을 올리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지난달 여론조사 기관 갤럽은 미국인 18세 이상 근로자 1만5000여 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미국인 근로자 50% 이상이 사실상 ‘조용한 사직’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갤럽은 응답자들에게 업무 몰입도를 물어본 결과 각각 ‘업무에 몰입 중’(32%), ‘큰 불만을 갖고 있다’(18%)고 답한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이들(50%)을 일에 열중하지도, 그렇다고 적극적인 불만도 없이 회사를 다니는 ‘조용한 퇴사자’들로 분석했다. 특히 35세 미만 청년 근로자들의 취업 만족도가 떨어지고 직장에서 발전할 기회를 얻으리라 기대가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덧붙였다.
지난달 미국 정치전문매체 ‘더힐’은 “조용한 사직은 일과 삶의 균형을 유지하겠다는 의지로 MZ세대가 주도한다”며 “코로나19 팬데믹이 초래한 ‘대퇴직(Great Resignation)’의 연장선”이라고 설명했다. 재택근무를 하면서 직장 소속감이 낮아지고, 일과 삶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직장인들에게 ‘성공’의 개념이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해석이다.
반면 ‘게으른 직원’이라는 곱지 않은 시선과 함께 영국 BBC방송은 지난달 “이에 맞서 기업에서는 게으른 직원에게 업무를 주지 않는 등 ‘조용한 해고’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 “최근 물가가 치솟는 인플레이션에 실질 임금이 낮아지면서 ‘조용한 사직’ 현상은 더 심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 한국에도 부는 바람…2030 청년층에 뚜렷
“월급을 더 주는 것도 아니고 고생만 더 할 것 같은데…”
금융권 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김모 씨(32)는 최근 회사에서 ‘주요부서’로 꼽히는 자리에 갈 기회가 있었지만 잠시 고민한 뒤 가지 않았다. 그는 “열심히 해서 승진해 봐야 임원이 되는 건데, 임원 돼봐야 파리 목숨이다. 지금 회사에 목숨 바친다고 해서 내 노후, 인생을 책임져 주지 못한다”며 “굳이 시간과 에너지를 회사에 더 들이고 싶지 않다”며 현 부서에 남았다. 대신 맡은 업무는 ‘문제가 생기지 않게’ 처리하고, 제 시간에 퇴근한 후 저녁에는 아내와 함께 집밥을 해먹고 달리기를 즐기거나 개인 재테크 공부를 하기도 한다.
이미 한국에서도 김 씨와 같이 ‘조용한 사직’을 택한 사람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지난해 12월 채용 플랫폼 사람인이 직장인 3923명을 대상으로 ‘회사 업무와 월급의 관계’에 대해 설문한 결과, 응답자의 70%가 “딱 월급 받은 만큼만 일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전체 응답자의 61.4%가 ‘열심히 일한만큼 월급이 오르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회사는 늘 월급보다 높은 성과를 요구한다’(89.7%)고 답했다.
임민욱 사람인 커뮤니케이션팀장은 “젊은 세대는 각종 수행평가나 시험 등을 통해 자신이 노력한 만큼의 성과와 보상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기성세대는 고도 성장기에 ‘열심히 일했더니 회사도 크고 내 자산도 축적했다’는 경험을 갖고 있다”며 “기업에서도 이들의 배경을 고려해 성과 보상이나 조직 문화에 대한 신중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예윤 기자 yea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