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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데니 태극기 본 순간 ‘대한민국 보물’ 바로 알아”

입력 | 2022-11-01 03:00:00

현존 最古 태극기, 美서 찾아 韓 반환 기여한 스워타우트 교수
고종 외교자문의 후손 美자택서 1977년 ‘데니 태극기’ 찾아내
5년 가까이 후손에 韓 기증 설득
“독립 국가 열망하며 만든 국기… 희망 이뤄낸 한국에 가야 뜻 깊어”



가로 262cm, 세로 182.5cm로 국내에 현존하는 옛 태극기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보물 ‘데니 태극기’.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45년이 지나도 ‘데니 태극기’를 처음 본 날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먼지 덮인 상자를 여는 순간 바로 알았어요. 아, 이건 대한민국의 보물이구나.”

10월 28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 집옥재에서 만난 로버트 R 스워타우트 미국 캐럴대 역사학과 명예교수(73·사진)는 ‘데니 태극기’와의 조우를 “운명 같은 만남”이라 불렀다. 한국말이 유창한 그는 국내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태극기인 ‘데니 태극기’의 존재를 알리고 이를 국내로 반환하는 데 결정적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최근 한국인 부인과 처가인 제주도에 들른 뒤 서울에 왔다.

1975년 근대 조미 외교사를 석사 논문으로 준비하던 스워타우트 교수는 미 오리건대 도서관에서 손바닥만 한 고서 하나를 발견했다. 19세기 중국에 다녀온 미 외교관 문서로 ‘포틀랜드 출신 변호사 오언 데니(1838∼1900)가 1886∼1890년 조선에서 고종의 외교자문을 지냈다’는 기록이 담겨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여러 도서관을 몇 달 동안 뒤져 ‘데니 외교문서’들을 찾아냈어요. 거기서 데니 변호사가 조선 독립을 위해 분투한 흔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료도 있을 것 같아 오리건주에 사는 후손을 만나기 위해 수소문했어요. 마침내 1977년 후손인 윌리엄 랠스턴 변호사 부부 집에서 태극기가 담긴 상자를 찾아냈죠.”

가로세로 262×182.5cm인 데니 태극기는 스워타우트 교수가 찾기 전엔 존재조차 몰랐던 유물이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10월 25일 이를 보물로 지정하며 “1882년 고종이 태극기를 제정한 뒤인 1889∼1890년 무렵 제작된 것으로, 국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로 가치가 높다”고 밝혔다.

스워타우트 교수는 데니 태극기의 존재를 알리는 데 그치지 않았다. 5년 가까이 랠스턴 변호사 부부와 연락하며 한국에 기증하도록 설득했다. 그는 “외세 침략에도 꿋꿋이 독립을 쟁취한 한국의 역사를 사랑한다”며 “생김새는 한국인과 달라도 조선 독립을 지키려 했던 데니처럼 한국 문화재를 지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독립을 열망하며 만든 국기입니다. 미국보다 그 희망을 현실로 이룬 한국에 갔을 때 더 뜻깊죠. 결국 랠스턴 변호사가 ‘한국에 보내고 싶다’고 했을 때, 역사학자로서 뿌듯했습니다.”

1981년 6월 고국의 품에 안긴 데니 태극기는 귀환 40년 만인 지난해 보물로 지정됐다. 소식을 들은 스워타우트 교수는 “한국 젊은이들이 그 가치를 알고 역사를 배울 수 있게 돼 기뻤다”면서 “당장 한국에 오고 싶었지만 팬데믹 때문에 이제야 왔다”며 웃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데니 태극기에는 고난에도 자유롭고 강한 나라가 되고자 했던 조선의 희망이 담겼어요. 이미 그 꿈을 이뤄낸 한국에서 청년들도 이 태극기를 보며 더 큰 희망을 품길 바랍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