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비켜간 양곡관리법 개정 논쟁 쌀 초과생산 해결부터 머리 맞대야
박용 부국장
고물가시대에도 내리는 게 있다. 9월 소비자물가가 5.6% 올랐는데, 쌀값은 17.8% 떨어졌다. 지난해 풍년이 든 데다 올해도 25만 t의 쌀이 초과 생산될 것으로 예상된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낙엽처럼 떨어질 쌀값 걱정에 농민들의 시름이 깊다.
한국 쌀 시장은 만성적 공급과잉 상태다. 소비가 빠르게 줄고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가 떠나는 위태로운 시장에서 쌀값을 지탱하는 건 정부다. 쌀이 과잉 생산되면 양곡관리법 기준(초과 생산량 3% 이상이거나 쌀값 평년 대비 5% 이상 하락)에 따라 세금으로 남아도는 쌀을 사들이는 ‘시장 격리’(정부 매입)를 한다. 정부는 기준을 충족한 11번 중 2006년을 빼고 10번 시장 격리를 했다.
올해도 식량 안보를 위한 공공비축미 45만 t에 더해 역대 최대 규모인 45만 t의 쌀을 시장 격리한다. 총 쌀 생산량의 약 4분의 1이 시장에 풀리지 않고 정부 양곡 창고로 직행하는 셈이다. 정부 발표 이후 10월 5일 기준 쌀 산지 가격이 9월 25일 대비 16.9% 올랐다. 초과 생산을 해결하지 못하니 세금으로 쌀값 하락 고통을 덜어주는 ‘진통제’만 놔준 셈이다.
야당은 지난해 정부 대응이 늦어 쌀값 급락을 미리 막지 못했다며 이참에 정부 재량권을 없애고 법이 정한 기준에 부합하면 자동으로 쌀 초과 생산량을 시장 격리하게 의무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와 여당은 그렇게 하면 쌀 공급 과잉 구조를 해결하지 못하고 2030년까지 연평균 1조 원의 시장 격리 비용이 들어간다며 반대하고 있다.
야당 주장처럼 시장 격리를 의무화하면 쌀값이 급락해도 농가 소득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정부가 끌어올린 쌀값 부담은 국민들의 몫이다. 소비자들은 쌀값 안정에 들어가는 세금도 내고 비싼 쌀값까지 감수하는 ‘이중 부담’을 져야 한다. 흉년이 들어 쌀값이 크게 뛰어도 다음 해 풍년이 들어 초과 생산이 발생하면 정부가 자동으로 쌀을 매입해야 하기 때문에 시장에서 쌀값이 떨어지지 않거나 더 오르는 황당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야당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포함된 쌀 생산 조정 방안(논에 벼가 아닌 다른 작물을 재배하면 지원)이 실행되면 시장 격리 비용이 줄 것이라고 반박한다. 하지만 정부가 쌀값을 지탱해 주는데 판로도 불확실하고 소득도 적은 다른 작물을 재배할 농민이 얼마나 될까. 농촌경제연구원은 시장 격리를 의무화하면 쌀 초과 생산량이 올해 25만 t에서 2030년 64만 t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시장 격리 의무화가 오히려 생산 조정을 방해해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국내 농가의 절반이 쌀농사를 짓고 농업 소득의 32.9%는 쌀에서 나온다. 국가부채가 빠르게 늘고 있는 상황에서 재정으로 무한정 쌀값을 지탱할 순 없다. 언젠가 정부가 ‘산소호흡기’를 갑자기 떼면 쌀 농가가 받을 충격은 상상하기 어렵다. 농가의 미래와 소비자에게 모두 보탬이 되는 일은 논 재배 작물을 다각화하고 만성적 쌀 공급 과잉을 해결하는 구조개혁이다. ‘쌀값 진통제’ 논쟁으로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