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이 낭자한 소주 시장에 혜성같이 등장한 검은 병이 있습니다. 래퍼 박재범이 설립한 소주 스타트업 ‘원스피리츠’에서 출시한 원소주가 그 주인공인데요. 품귀 현상이 이어져 사고 싶어도 살 수가 없을 정도죠. 증류식 소주가 국내에서 이토록 입지를 넓힌 것은 처음입니다.
박재범 대표의 인기 덕분에 잘나가는 것 아니냐고요? 연예인의 참여로 ‘반짝’한 브랜드는 많지만 지속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원소주가 출시 7개월 만에 MZ세대 ‘원’픽으로 자리 잡은 이야기를 전해 드립니다.
소주를 원한 두 남자
좌측부터 박재범 대표와 김희준 PM_출처 : 원스피리츠
“We bout to get lit off the soju.” 박 대표가 지난 2018년 발표한 노래 ‘SOJU(소주)’ 가사 중 일부입니다. 소주를 마시고 진탕 취해보자는 곡을 낼 만큼 그는 애주가인데요. 음원 발표 기념으로 초록병 소주를 나눠주자 해외 아티스트들이 ‘직접 만든 술이냐’고 물어왔습니다. 주류 브랜드 론칭을 본격적으로 고민하게 된 계기죠. 이듬해부터 그는 콘서트나 방송 어디서든 소주를 출시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말할 정도로 ‘진심’이었습니다.
그 시점 김희준 원스피리츠 PM 역시 주류 사업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2019년 스코틀랜드에 방문해 증류소 투어를 다니며 ‘내 브랜드의 술을 만들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죠. 마침 지인이 박 대표를 소개해 주면서 일은 일사천리로 흘러갔습니다. 박 대표는 소주를 만들고 싶었고 김 PM은 증류주에 마음이 뺏겨 있었죠. 둘이 머리를 맞대자 자연스레 ‘증류식 소주’로 의기투합했습니다.
출처 : 원스피리츠
끝내 감압증류(증류기 압력을 대기압보다 낮춰 낮은 온도로 증류) 방식으로 깔끔한 맛을 자랑하는 충북 충주 ‘고헌정’과 상압증류(대기 압력과 같은 압력에서 증류)방식으로 풍부한 향이 강점인 강원 원주 ‘모월’과 손잡았습니다.
이 둘을 택한 까닭은 여과에 진정성을 보여서라는데요. 여과 방식에 따라 술맛은 확연히 달라집니다. 테네시 위스키는 차콜(숯)에 여과하기 때문에 버번 위스키와 맛이 달라지는 것처럼요. 고헌정도 독특한 ‘냉동 여과’ 방식을 통해 보다 부드러운 맛을 내죠.
준비는 끝났습니다. 사업을 구상한지 4년 만인 지난 2월 여의도 더현대서울 팝업스토어에서 개시했죠. 하루 동안 2만 병을 한정 판매했는데 오픈 전날 오후 10시부터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렸습니다. 3월부터는 온라인 판매를 시작합니다. 어디서든 전통주와 지역 특산주를 살 수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죠.
원스피리츠는 기존 원소주 오리지널에 이어 지난 7월 GS25와 손잡고 오프라인 판매 전용으로 ‘원소주 스피릿’을 개발합니다. 두 달 뒤 출시한 ‘원소주 클래식’도 고공행진 중입니다. 원소주는 왜 이렇게까지 인기가 있을까요?
세상에 독한 술은 없다
출처 : 원스피리츠
신선한 ‘증류식 소주’로 승부를 본 것이 첫 번째 이유. 팬데믹 이후 홈술 트렌드가 이어지면서 와인과 위스키처럼 고가 술에 대한 거부감이 낮아졌습니다. 자연스레 한 병에 1만 4900원으로 초록병에 담긴 소주보다 약 10배 가까이 비싼 원소주에 대한 문턱도 낮아졌죠.
다양한 라인업으로 각기각층의 수요를 잡은 것이 두 번째 이유입니다. 2주간의 옹기 숙성을 생략한 대신 2도 높인 스피릿은 보다 대중적입니다. 김 PM이 편하게 마시기 가장 좋다고 꼽은 술로 맵고 짠 한식과 잘 어울리게끔 제조됐죠.
지난 8월 하이트진로도 프리미엄 증류소주 ‘진로 1924 헤리티지’를 출시했다. 희석식 소주 대신 증류식 소주 시장이 커지면 국내 주류 시장의 지평이 넓어져 간다_출처 : 하이트진로
클래식은 앞선 두 라인이 감압증류 방식으로 제작하는 것과 달리 상압증류 방식으로 제작합니다. 누룩향이 더 강하고 맛도 더 풍부하죠. 김 PM은 “클래식은 풍미가 강해 고기 종류랑 먹을 때 가장 잘 어울린다”면서 “기름진 육즙을 술이 감쌀 때의 페어링이 완벽하다”고 입맛을 다십니다.
이번에는 도수를 4도나 높인 28도인데요. 아로마가 풍부한 증류주는 도수가 높을수록 더 맛있다는 김 PM의 지론이 담겨 있습니다. 술꾼들 사이에선 클래식이 가장 맛있다고 입소문 났습니다. 고도주로 확장도 모색하는데요. 40도대와 50도대로 시험한 후 더 맛이 좋은 쪽으로 내년 초에 출시할 계획입니다.
저도주 트렌드가 이어지는 가운데 '독한' 술을 내놓는 것이 옳은 선택일까요? 외국에는 술이 ‘독하다’는 표현이 없다고 합니다. 감미료가 더해진 희석식 소주에 입맛이 길들여지면서 순한 술을 찾는다는 지적인데요. 술 본연의 맛은 도수가 올라갈수록 당연히 더 맛있는 것이라고 하네요.
소주로 HYPE을 말하는 법
디자인 요소가 가미된 라벨이 빈티지한 멋을 더한다_출처 : 원스피리츠
보다 깊숙이 들어가 보면 원소주 흥행은 맛보다 ‘멋’을 빼놓을 순 없겠죠. 박 대표의 힙하고 세련된 이미지가 술에도 그대로 입혀졌습니다. 유명 래퍼들이 원소주를 즐기는 모습이 노출되면서 셀럽이 마시는 술이라는 인상도 더했죠. 김 PM 역시 “맛은 사실 느끼기에 따라 여느 술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수 있다”면서 “원소주가 만들어가는 문화를 사람들이 즐기는 것이다”고 전합니다.
출처 : 원스피리츠
희소성으로 대중의 소비 심리를 자극하기도 했습니다. 오리지널의 일 생산량은 2000병입니다. 스피릿은 월 100만 병까지 생산 가능하지만 수요에 비하면 한참 모자랍니다. 하루에 지점별로 단 4병씩 들어오는 바람에 스피릿을 찾아 편의점 투어를 다니는 이도 있죠. 클래식은 2만 1900원이지만 일 1500병 판매 물량이 매번 동납니다. 다만 의도적으로 공급을 줄인 것은 아니라고 하는데요. 현재 공장을 확장하는 중으로 추후 수출이 가능할 정도로 물량 생산을 늘릴 것이라고 밝힙니다.
독특한 컬래버레이션도 이목을 끕니다. 클래식은 처음부터 엔씨쏘프트의 게임 ‘리니지W’와 협업해 한정판으로 내놓았는데요. 이후 금융, 자동차 등 이종 산업과 손잡는 것도 고려 중이라고 합니다. 예컨대 아파트 입주 선물로 원소주를 제공하는 식이죠. 주류 업계에서 일한 경험이 없는 김 PM과 박 대표이기에 기존 방식이 아닌 색다른 브랜딩을 전개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신개념 한류스타
원소주는 처음부터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박 대표는 “직장인이 퇴근했을 때, 하루를 위로하고 미래의 파이팅을 외칠 수 있는 술이면 좋겠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리니지W와 협업으로 만든 체스 세트_출처 : 원스피리츠
문화를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원스피리츠는 놀이 문화를 함께 만들어 갑니다. 윷놀이와 체스를 함께 판매하는 것인데요. 김 PM은 “좋아하는 놀이를 굿즈로 만들어서 술 마실 때, 재미를 더하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이번 클래식 리니지W 에디션을 출시하면서는 게임 아이템을 뽑을 때 나오는 화면이 체스판이라는 데서 착안해 체스 게임을 고안했죠.
점차 늘어나는 수요에 대해서도 준비 중입니다. 이미 원주 농협과 내년에 쓸 쌀 5200톤(t) 계약을 마쳤는데요. 마침 올해 쌀이 풍년인 만큼 농민들의 판로 고민도 덜어냅니다. 나아가 한류를 이끄는 술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데요.
최근 박 대표가 미국과 영국에서 공연할 때, 관객의 8할이 원소주를 안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K-POP 공연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높은 비율이죠. 현재까지 수출을 문의한 국가만 70개국이 넘습니다. 스피릿(증류 원액)에 익숙한 외국 소비자의 입맛을 겨냥해 본격적으로 해외시장의 문을 두드리겠다는 포부입니다.
“소주는 편한 친구 같은 술입니다. 좋은 술, 좋은 음식, 좋은 사람과 적당히 마시고 적당히 즐기는 진짜 술의 매력을 전하고 싶습니다”(김 PM).
인터비즈 조지윤 기자 georg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