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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없는 인생 어디 있으랴… 시험 불합격의 절망 딛고 더 나은 미래가 펼쳐지길

입력 | 2022-11-03 03:00:00

[한시를 영화로 읇다]<47>낙방을 부끄러워할 필요 없네



영화 ‘국도극장’에서 사법시험에 낙방한 뒤 고향에 내려와 극장 매표원이 된 기태(오른쪽)는 극장 간판을 그리는 오씨에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명필름랩 제공


대입 시즌이 시작됐다. 합격한 소수의 기쁨 뒤에는 불합격한 다수의 슬픔이 있다. 실패하지 않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한시에서도 낙방은 많이 읊은 주제 중 하나였다. ‘당시유원’(唐詩類苑)에서는 ‘낙제(落第·과거 시험에 떨어짐)’란 항목을 별도로 두기까지 했다. 당나라 시인 가도(779∼843)도 과거에 낙방하고 다음 시를 남겼다.


한미한 출신의 시인은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지만 권세가 자제들에게 밀려 낙방하곤 했다. 심지어 태도가 건방져 분위기를 해친다는 이유로 시험장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시인은 참담한 심경을 병든 매미(病蟬)나 가을 매미(早蟬)에 빗대어 토로하기도 했다. 이 시에서도 자신을 뽑아주는 시험관이 없는 현실을 한탄하며 세상을 등지고 싶은 절망감을 드러냈다.

시인이 낙방으로 인한 궁핍을 호소한 것처럼, 전지희 감독의 ‘국도극장’(2020년) 주인공 기태도 오랜 사법고시 준비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 기태는 수차례 고배를 마신 뒤 사법고시마저 폐지되자 고향에 내려와 오래된 영화관에서 일하게 된다. 마지못해 취업은 했지만 성공한 고향 친구와 대비되는 초라한 처지와 고시 준비로 허비한 세월을 질타하는 형과의 갈등으로 마음이 편치 못하다. 시에서도 합격을 축하하는 소란스러운 잔치와 대비되는 시인의 고단한 처지가 부각된다.

시대와 성격이 다르지만 과거와 고시 제도는 성공과 실패의 명암을 극명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시인은 절망만 하지 않았다. 동료에게 낙방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고 뛰어난 인재를 뽑지 않은 시험관들이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일갈했다(‘送沈秀才下第東歸’, “下第子不恥, 遺才人恥之”). 과거 제도의 불공정함에 대한 항변이다.

영화도 기태의 현실을 절망적으로만 그리지는 않는다. 어느 날 서울로 올라가려는 마음을 접고 홀로 국도극장을 지키던 기태의 눈에 보도블록 사이로 핀 노란색 들꽃이 들어온다. 꽃과 함께 사진을 찍는 기태의 입가엔 엷은 미소가 번진다. 극장에 걸린 옛 홍콩 영화 ‘영웅본색’ 간판에는 저우룬파(주윤발)의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기태가 그려져 있다. ‘영웅본색’의 영어 제목처럼 시험에 불합격한 이들에게도 쓰라린 과거만이 아니라 ‘더 나은 미래(A Better Tomorrow)’가 있길 바란다.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