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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그늘 벗고… ‘온전한 나’로 일어선 女화가들

입력 | 2022-11-03 03:00:00

하인두 작가의 부인 류민자
안상철 화백의 부인 나희균
이건용 화백 부인 승연례 등
잇단 개인전 열며 작가의 삶




“그의 아내가 아닌/나의 이름으로 서 있는 이곳/아직 낯설어/그의 그림이 아닌/나의 그림으로 채워진 이곳/그건 더 새로워….”

올해 9월 처음 선보인 창작뮤지컬 ‘라흐 헤스트’는 여성 화가이자 미술평론가인 김향안(1916∼2004)의 삶을 재조명한 작품. 시인 이상(1910∼1937)과 화가 김환기(1913∼1974)라는 두 천재 거장의 부인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김향안 역시 자기만의 세계를 공고히 구축한 예술가였다. ‘라흐 헤스트’는 “예술은 남다”라는 프랑스말로,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는다”라는 김향안의 어록에서 따왔다.

과거부터 미술을 포함한 예술무대는 남성 중심으로 흘러갔다. 유명 화가의 부인은 그들을 뒷받침하는 조력자로 여겨졌다. 하지만 상당수는 독립적 정체성을 지닌 미술가들이었다. 최근 미술계에선 이들의 작품을 재조명하며 평가도 다시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류민자(위 사진)의 ‘피안’(2002년). 중간중간 단절된 굵고 짧은 선이 특징으로, 대담한 배치와 화사한 색감을 통해 ‘색면 산수화’를 개척했다. ⓒ류민자 

서울 종로구 갤러리라온에서 2일 만난 류민자 작가(80)는 “고유한 한 명의 작가로 인정받고 싶고,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국적 추상화의 대표주자였던 하인두(1930∼1989)의 부인인 그는 올해 6, 7월 이곳에서 한국화 등 50여 점을 선보인 개인전 ‘류민자’를 열었다.

“한국 근현대 여성 작가들은 가사와 육아, 내조로 1인 3, 4역을 해야 했죠. 전업 작가는 꿈도 못 꿨어요. 물론 그게 당시엔 주어진 삶이었으니 후회는 없어요. 이 나이에도 붓을 들 수 있어 감사할 따름이죠.”

나희균(위 사진)의 ‘무제’(2019년). 1960∼80년대에 네온, 파이프, 철 등으로 입체 작품을 만든 나 작가는 1990년대에 회화 작업으로 돌아온다. 안상철미술관 제공 

한국화가 안상철(1927∼1993)을 기리며 세운 안상철미술관이 최근 나희균 작가(90)를 소개하는 데 애쓰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안상철의 부인인 그가 살아 있을 때 제대로 조명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 작가는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나혜석(1896∼1948)의 조카다. 나 작가의 큰딸인 안재혜 안상철미술관장은 “어머니는 시간이 많지 않다고 여기시는지 매일 식사하듯 작품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1세대 조각가인 문신(1922∼1995)의 부인이자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명예관장인 최성숙 작가(76)는 요즘 잠잘 시간도 쪼개 쓴다. 동양화를 주로 그려온 최 작가는 “올해가 문신 탄생 100주년인 데다 프랑스에서 열린 한국작가 초대전에 제 작품도 출품해야 해 너무 바빴다. 지난달 31일부터 열린 ‘문신 탄생 100주년 기념 국회특별전’도 기획했다. 예술작업과 외부활동을 함께하는 게 참 힘들긴 하다”고 했다.

승연례(위 사진)의 ‘Palm Tree’(2022년). 식물에 큰 애정을 가진 작가는 푸른색 계열의 색채로 꽃 나무를 그렸다. 야자수는 그가 애호하는 소재다. ⓒGallery Joeun 

뒤늦게 작가의 길로 들어선 이도 있다. 국내 1세대 행위예술가로 꼽히는 이건용 화백(80)의 부인 승연례 작가(73)는 2017년 첫 개인전을 가진 뒤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올해 9월 세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승 작가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미술을 전공했지만 결혼 뒤 가사에 집중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는 언제나 가득했는데, 갤러리 측에서 작품을 보고 요청해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정필주 울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는 “박래현(김기창 부인)과 박인경(이응노 부인) 등 화가의 부인은 한국 사회가 요구한 내조자의 길을 걸으면서도 예술을 고민한 당대의 화가였다”며 “유명 화가의 부인이란 편견 없이 작품만으로 제대로 평가를 받을 기회가 적었다”고 했다. 황규성 갤러리라온 대표도 “여성 원로 작가들은 작품보다 누군가의 부인이나 어머니로 정의되는 일이 많았다”며 “이젠 미술계도 그들을 다룬 전시는 물론이고 학술적인 연구도 본격적으로 진행해 정당한 지위를 찾아줄 때가 됐다”고 말했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