핼러윈이던 지난달 31일 일본 도쿄 시부야 일대가 몰려든 젊은이들로 북새통이다. 이날 경찰과 민간 요원 수백 명이 동원돼 질서 유지에 나섰고 술 판매를 금지하는 등 사고를 막기 위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함께 힘썼다. 도쿄=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
이상훈 도쿄 특파원
“오늘 이곳으로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이곳은 출구 전용 개찰구입니다. 뒤로 돌아서 역에 들어가 주세요.”
평소에는 일반 전철역처럼 교통카드를 찍고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지만 이날은 철저하게 동선이 분리됐다. 개찰구에 설치된 교통카드 리더기를 조작해 교차로와 직접 연결된 출구로는 아예 역에 진입할 수 없게 차단했다.》
이날 핼러윈을 맞아 시부야는 일본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몰린 젊은이들로 혼잡했다. 요란하게 분장한 젊은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곳곳에서 질서를 지키지 않는 건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경찰과 철도회사, 민간 요원들이 인해전술식으로 질서를 유도해 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경찰들 로프 잡고 인파 차단
지난달 31일 일본 도쿄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에서 경찰들이 로프를 이어 잡고 보행자를 통제하고 있다. 도쿄=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
인파가 몰려들자 일본 경찰은 인해전술을 선택했다.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는 폭이 서로 다른 5개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이 일시에 바뀐다. 모든 횡단보도 입구 10곳에 경찰들이 로프를 잡고 몇 m 간격으로 서서 인간 띠를 만들었다. 빨간불일 때는 보행자를 막아서다가 파란불이 들어오면 차단기가 열리듯 로프를 옆으로 치워 건너게 했다. 경찰차 지붕에서 안내 방송을 하는 ‘DJ(디스크자키) 폴리스’도 따로 있었다.
그럼에도 워낙 인파가 몰리다 보니 100% 완벽하게 통제가 되진 않았다. 횡단보도에서 웃고 떠들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이며, 동영상을 찍으며 방송하는 유튜버들까지 몰려 아수라장이었다. 하지만 횡단보도 주변에 늘어선 100명 넘는 경찰은 강력하게 사람들을 통제했다. 스마트폰 사진을 찍느라 빨간불로 바뀌었는데도 인도로 올라오지 못하는 보행자에게 경찰은 긴 나무막대를 꺼내 인도 쪽으로 밀어 넣었다. 제때 건너지 않고 머뭇대거나 이상한 행동을 하는 행인들에게는 지속적으로 소리치며 경고했다. 파란불이 깜빡거리기 시작하면 경찰들은 신호가 곧 바뀐다는 의미로 일제히 호루라기를 불었고 DJ 폴리스는 “빨간불이 들어오니 빨리 이동해 달라”고 안내방송을 했다.
당초 시부야 교차로 일대에 경찰 350명을 배치하기로 한 일본 경시청은 서울 이태원 핼러윈 참사 이후 인력을 추가 배치했다. 교차로 횡단보도 외에 인도나 뒷골목에도 순찰 경력을 뒀다. 이태원 사고 현장과 비슷하게 경사진 길로 지목된 일명 ‘스페인 언덕길’에는 경찰들이 상주하며 대비하는 모습이었다.
맥주 캔 든 청년에 “술 안 돼요”
“여기서 술은 안 됩니다. 노(No) 알코올.” 시부야 교차로에서 맥주 캔을 들고 있는 청년에게 경찰이 크게 소리쳤다. 술을 뺏거나 연행하진 않았지만 모두에게 들릴 정도로 큰소리였다. 당황한 청년은 한 모금을 더 마시더니 이내 재킷 주머니에 캔을 넣고 종종걸음으로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지난달 28∼31일 핼러윈 기간 시부야는 예외였다. 시부야구는 자체 조례를 통해 이 나흘간 저녁 시간에는 시부야 교차로 및 인근 길거리에서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고 편의점 식당 등에서의 주류 판매도 금지시켰다. 다만 처벌 규정은 없어 지키지 않아도 처벌받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여기저기 뒷골목에서 술을 마시거나 길거리에서 일회용 컵에 따른 술을 한 잔에 500엔(약 4800원)을 받고 파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그래도 술에 취해 길에 쓰러지거나 행패 부리는 모습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지방자치단체와 경찰이 공개적으로 ‘술은 안 된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파하면서 술 마시기를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가 곳곳에 배어 있었다. 한글이 선명하게 쓰인 초록색 소주병을 든 서양 여성 3명이 웃고 떠들며 한 식당에 들어서려 하자 종업원은 “죄송하지만 들어오실 수 없다”며 막아섰다. 주류 금지 조례가 시부야에서 음주를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심각한 음주 사고 예방에는 효과를 발휘하는 것 같았다.
시부야구 관계자는 “단체로 술을 마시면 더 흥분해서 사고 위험이 커진다. 핼러윈 기간에 특정 장소에서만 음주와 술 판매를 제한하는 것인 만큼 시민들도 이해해 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2001년 압사 사고 후 매뉴얼화
일본이 이처럼 군중 밀집 지역을 강력하게 통제하게 된 것은 2001년 효고(兵庫)현 아카시(明石)시에서 발생한 불꽃놀이 압사 사고가 결정적 계기였다. 그해 7월 아카시시 불꽃축제에는 전국 각지에서 수만 명이 몰렸다. 사고는 축제가 끝난 뒤 발생했다. 행사장 인근 전철역과 연결된 육교에 사람이 몰렸다. 넓은 해수욕장에서 축제를 즐긴 인파가 한꺼번에 육교로 몰려 전철역이라는 특정 지점으로 향하자 극단적 병목 현상이 생긴 것이다. 이 사고로 11명이 숨지고 183명이 다쳤다.정부와 효고현이 사고 원인 규명에 나선 결과 경찰과 사설 경비업체 간 사전 협의가 불충분했고, 상황이 다른 과거 경험을 답습해 안이하게 경비 계획을 마련한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일본에서 다시 사회문제로 떠오르던 오토바이 폭주족 단속에 경찰 인력이 투입돼 정작 행사장 경비에는 40여 명밖에 투입되지 않은 점도 밝혀졌다. 위험을 알리는 경찰 신고 전화가 몇 차례 걸려왔지만 제대로 연결되지 않은 점도 지적됐다.
하지만 책임자 처벌보다 더욱 눈에 띄는 건 이후 철저한 매뉴얼이 구축됐다는 점이다. 효고지방경찰청은 사고 이듬해인 2002년 107쪽 분량의 ‘군중사고 대처 가이드라인’을 제작했다. 이 가이드라인은 지금도 일본 전국 경찰의 군중 사고 예방 기본서로 쓰이고 있다. 효고경찰 측은 “미증유의 대참사로 벌어진 희생을 계기로 다시는 이런 비참한 사고가 일어나도록 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가슴에 새기고 만들었다”고 밝혔다.
당시 사고에서 아들을 잃은 시모무라 씨는 이태원 핼러윈 참사 직후 일본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사고가 나면 곧바로 정치적 문제로 번지는 것 같은데 사고로서 차분히 검증했으면 한다. 경찰이 상황에 따라 대응하겠다는 의식이 높아야 한다.”
이상훈 도쿄 특파원 sangh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