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 저녁 서울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린 ‘앰비언트 뮤직 콘서트―그대에게’에서 타악 주자 최진석 씨(가운데)가 국악기 정주를 연주하고 있다. 정주는 놋그릇 모양의 타악기. 한 손으로 받쳐 든 채 바깥 면을 채로 빙빙 돌려 마찰하면 묘한 백색소음이 난다. 마포문화재단 제공
임희윤 기자
한때 디자이너를 꿈꾼 적 있다. 패션 디자이너도, 헤어 디자이너도 아니고 사운드 디자이너다. 2000년대 초반, 브라질 음악가 아몽 토빙, 영국 음악가 러스트모드의 실험적 작품들을 접하며 받은 충격이 사운드 디자인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유학까지 알아봤었다.
어려운 말 같지만 한국어로 옮기면 그저 ‘소리 설계’다. 청자의 귀에 들리는 모든 음을 입체적으로 구성하고 그 결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다듬는 장인이 사운드 디자이너다.
#1. 어떤 사운드 디자이너들은 다수의 대중이 열광하는 음악적 요소들에 되레 냉담한 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동요 ‘학교 종이 땡땡땡’을 예로 들자. 주선율에 해당하는 ‘솔-솔-라-라-솔-솔-미’, 화성에 속하는 ‘도미솔-파라도-솔시레’…. 이런 것들은 토빙과 러스트모드에게 ‘학교 종이…’의 리메이크를 맡긴다면 관심 밖으로 밀려날 거다. 디테일에 사족을 못 쓰는 그들이 피아노 뚜껑을 열어보기도 전에 할 일은 필시 전국의 학교 종소리를 채록하러 떠나는 것일 것.
내 맘대로 짠 토빙과 러스트모드의 가상 대화다.
#2. 일부 실험음악가의 편집증처럼 느껴지는 사운드 디자인은 요새 좀 더 폭넓은 각광을 받는다. 올라퓌르 아르날즈(아이슬란드), 닐스 프람(독일) 같은 음악가는 지극히 아름다운 선율 사이로 굳이 낡은 피아노의 페달 밟는 소리를 적나라하게 넣는다. 듣다 보면 삐걱대고 서걱거리는 그 음향에 빠져든다. 모닥불 타는 소리, 귀지 파는 소리도 ASMR(자율감각쾌락반응) 콘텐츠라며 인기를 얻는 트렌드와 일맥상통할까.
#3. 서걱거림의 사운드 디자인에 제대로 꽂히면 급기야 더한 걸 찾게 된다. 러스트모드의 1994년 앨범 ‘The Place Where the Black Stars Hang’. 동명의 75분 48초짜리 곡 하나로 구성됐다. 먼 옛날, 이 음반을 국내에선 도저히 구할 수 없어 어둠의 경로로 내려받았다. 재생 버튼을 누른 지 1분…. 에러 난 파일을 잘못 받은 게 아닌지 미간이 상하도록 고민했다. 75분 48초 동안 그냥 휑한 바람 소리만 들렸으니까. ‘히아데스성단의 알데바란’ 같은 부제라도 붙어 있었기에 망정이다. ‘이건 천체의 운행을 표현한 심오한 소리에 틀림없음!’이라 결론 내며 열띤 감상을 이어갔다.
#4. 급기야 피아노 페달 밟는 소리, 바람 소리마저 사치라 느껴진다면 해독제는 하나다. 미국 실험음악가 존 케이지(1912∼1992)의 곡 ‘4′33″’. 2015년 가을 전남 구례군 화엄사에서 처음 접한 이 곡의 실황이 잊히지 않는다. 각황전 앞 특설무대에 천천히 걸어 나온 연주자는 피아노 뚜껑을 열고 손목시계를 보면대에 풀어 놓은 뒤 정확히 4분 33초 동안 가만히 앉아… 아무것도 안 했다. 그대, 무(無)에서 유(有)를 본 적 있는가!
#7. 일본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는 2017년 앨범 ‘async’의 첫 곡 ‘andata’를 특별한 피아노로 연주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침수된 피아노다. 바흐의 미사곡처럼 비장한 건반 선율 위에는 평균율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노이즈를 얹었다.
“교회가 바다에 집어삼켜지는 광경을 상상하며 만들었습니다.”
몇 년 전 인터뷰 때 그가 전한 말이다. 사카모토의 화룡점정은 소음이었던 셈.
우리 사회 어느 분야든 백색소음처럼 지나치기 쉬운 작은 디테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 ‘1데시벨’의 외침에 누군가는 귀 기울이고 다른 이는 귀를 닫는다. 때로는 소음까지 제자리에 놓이고 인정받을 때 그 온전한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멜로디야말로 전제군주라고 생각했던 음악의 세계마저 그럴진대….
임희윤 기자 i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