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순간에 빛나는 ‘전쟁 영웅’ 대통령 솔선수범 리더십·끈끈한 동료애 국민에 귀감
미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하십니까. 영어를 잘 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정미경의 이런 영어 저런 미국’으로 모이십시오. 여러분의 관심사인 시사 뉴스와 영어 공부를 다양한 코너를 통해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공간입니다. 아래 링크로 구독 신청을 해주시면 기사보다 한 주 빠른 월요일 아침 7시에 뉴스레터를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뉴스레터 신청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83995
이태원 핼러윈 참사 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사진은 5월 메모리얼 데이(현충일) 때 알링턴 국립묘지 무명용사 묘에 헌화하는 바이든 대통령. 백악관 홈페이지
(질과 나는 서울의 유가족들에게 매우 깊은 애도를 표한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에 대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성명입니다. 유가족에 대한 애도, 한미관계의 굳건함 등이 담겨 있습니다. “the United States stands with the Republic of Korea during this tragic time”(미국은 이 비극적인 시기에 한국과 함께 하겠다)이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습니다. 다른 나라 지도자들이 보낸 조의문도 거의 비슷한 내용입니다. 비극적인 사건사고 후 보내는 위로에는 ‘send deep condolence’(깊은 애도를 보낸다)라는 문구가 들어갑니다.
이번 사고 현장에는 의인(義人)들이 있었습니다. 심폐소생술(CPR) 등을 도우며 구조 활동에 힘쓴 이들은 자신의 선행을 내세우기 보다 더 많은 생명을 구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진정한 ‘시민 영웅’입니다.
미국에는 전쟁이라는 위기의 순간에 빛나는 리더십과 동료애로 국민에 귀감이 된 대통령이 여러 명 있습니다.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는 ‘war hero president’(전쟁 영웅 대통령)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1943년 솔로몬제도에 정박한 어뢰정 PT-109호 앞에서 부대원들과 존 F 케네디 중위(오른쪽 끝)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됐다. 적들이 내 배를 침몰시켰거든)
군인 시절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유명하게 만든 일화는 ‘솔로몬제도 사건’입니다. 1941년 해군에 입대해 2년 뒤 태평양 전선에 투입된 케네디 중위는 PT-109, PT-59 등 두 척의 어뢰정을 지휘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1943년 8월 일본 구축함의 공격으로 케네디 중위와 20여명의 미군이 승선한 PT-109호가 솔로몬제도 인근에서 파괴됐습니다.
케네디 중위는 가라앉은 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교과서에 나와 있지 않다. 여러분들은 집에 가족과 아이들이 있다. 어떻게 하기를 원하는가. 나는 잃을 것이 없다.” “잃을 것이 없다”는 것은 일본군에게 항복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밝힌 것입니다. 하지만 독단적인 결정을 피하기 위해 부하들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부하들도 항복을 원치 않았습니다. 케네디와 부하들은 5km 떨어진 무인도까지 헤엄쳐 가기로 했습니다. 선두에 있던 케네디 중위는 부상을 입은 한 부하가 자꾸 뒤쳐지는 것을 봤습니다. 자신도 부상을 입었지만 그는 부하의 구명조끼 끈을 이빨로 물고 15시간을 무인도로 헤엄쳐 갔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이 공훈으로 미 해군·해병대 영웅훈장, 전투 중 부상을 입은 군인에게 주어지는 ‘Purple Hearts’(퍼플 하츠) 훈장 등을 받았습니다. 대통령이 된 뒤 백악관을 찾은 어린이 방문객들로부터 “어떻게 전쟁 영웅이 될 수 있었느냐”는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그는 “내가 원한 건 아니었어. 적들이 내 배를 두 동강을 내버렸거든”이라는 겸손한 농담으로 답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 군시설 파괴 임무로 출격한 조지 H W 부시 대통령(오른쪽)이 전투기 추락으로 표류하다가 미군 잠수함에 의해 구조되는 모습(오른쪽). 조지 H W 부시 도서관 홈페이지
(그것이 나를 괴롭혀왔다)
‘아버지 부시’로 불리는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1941년 진주만 공습 때 명문 사립고교 필립스 아카데미에 다니던 17세 소년이었습니다. 그는 18번째 생일에 입대했습니다. 18세 이상이 돼야만 입대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받아놓은 예일대 입학 허가도 연기했습니다. 그는 19세 최연소 나이에 해군 전투기 조종사가 됐습니다.
1943년 그는 미군 전쟁포로들이 수용된 일본 지치지마 섬의 통신시설을 파괴하라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부하 2명을 태우고 출격했습니다. 목표 지점이 가까워오자 일본군의 공격으로 부시 일행이 탄 폭격기의 조종석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럼에도 임무를 완수한 그는 추락하는 비행기를 가까스로 바다 한가운데까지 몰고 나왔습니다. 부하들에게 뛰어내리라는 명령을 내린 뒤 자신도 뛰어내렸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목숨을 건졌지만 부하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부하 1명은 낙하산이 펴지지 않았고, 다른 1명은 미처 뛰어내리지 못했습니다. 고무보트에 의지한 채 몇 시간을 바다 위에 떠 있던 그의 눈앞에 거대한 잠수함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미군 잠수함 USS 핀백호에 의해 구조됐습니다. 당시 20세의 깡마른 청년 부시 대통령이 구조되는 순간은 핀백호 선원들에 의해 촬영된 영상으로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이 공훈으로 비행십자훈장(DFC), 대통령부대표창(PUC) 등 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공로보다 숨진 동료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앞섰습니다. 언론 인터뷰에서 “왜 다른 친구들의 낙하산은 펴지지 않았을까. 왜 나만 축복을 받은 것일까”라고 반문했습니다. “그 생각이 오랫동안 나를 괴롭혀왔다”고 고백했습니다.
‘plague’(플래그)는 중세시대 흑사병(페스트)에서 유래한 전염병을 가리킵니다. 현대에는 ‘전염병’이라는 의미보다 ‘나쁜 덩어리’라는 뜻으로 많이 쓰입니다. 한국인들이 ‘프라그’라고 부르는 ‘치석’은 ‘dental plaque’(덴틀 플래그)라고 합니다. 부시 대통령이 쓴 것처럼 ‘괴롭히다’ ‘아프게 하다’라는 뜻의 동사로도 많이 활용됩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날 작전에 투입되는 병사들과 얘기를 나누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연합군 총사령관(왼쪽).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연합군 총사령관이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날 쓴 ‘실패의 경우 편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도서관 홈페이지
(만약 누군가 이번 시도의 책임을 져야 한다면 온전히 나 혼자만의 것이다)
1944년 6월 6일 제2차 세계대전의 판도를 바꿔놓은 프랑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전개됐습니다. 미국 영국 캐나다 등에서 16만 명의 연합군이 참가한 인류 최대의 작전이었습니다. 연합군 총사령관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은 작전 전날 전투에 참가하는 부대들을 일일이 방문해 사기를 고취시켰습니다. 그가 만난 군인들은 아직 소년티가 가시지도 않은 젊은 청년들이었습니다. 이들을 거친 파도와 총알을 뚫고 적진으로 보내야 하는 아이젠하워 장군은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는 병영으로 복귀하는 차 안에서 운전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I hope to God I’m right.”(신에게 바라건대 내 결정이 옳아야 하는데)
그는 이날 저녁 메모지를 꺼내 편지를 썼습니다. ‘In Case of Failure Letter’(실패의 경우 편지)라고 불리는 이 편지는 작전이 실패로 끝났을 경우를 가정해 쓴 것입니다. ‘나의 공격 결정은 최상의 정보를 근거로 내린 것이지만 실패했다. 육해공 군인들은 모든 용기와 헌신을 보여줬다. 만약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것은 나 혼자만의 것이다’라는 내용입니다.
손편지이기 때문에 고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원래 ‘This particular operation’(이번 작전)이라고 썼다가 자신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는 의미로 ‘My decision to attack’(나의 공격 결정)이라고 고쳤습니다. 마지막 두 글자인 ‘mine alone’(나 혼자만의 것이다)을 강조하기 위해 밑줄을 그었습니다. 긴장한 나머지 작성 날짜를 ‘June 5’(6월 5일)가 아닌 ‘July 5’(7월 5일)라고 잘못 썼습니다.
66개 단어로 이뤄진 이 편지는 미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명문 중의 하나로 꼽힙니다. 화려한 미사여구가 등장해서 아니라 힘든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에 책임을 지는 리더의 모습이 군더더기 없이 표현됐기 때문입니다. 실패에 대한 구구절절한 변명은 없습니다. 정치 경력이 전무했던 아이젠하워 장군이 1952년 압도적인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편지를 지갑에 보관했습니다. 작전이 실패하면 라디오 연설을 통해 읽을 예정이었습니다. 작전이 성공으로 끝나면서 편지는 영영 빛을 보지 못할 뻔 했습니다. 나중에 편지를 발견한 아이젠하워 장군은 구겨 버리려고 했지만 그 내용을 본 보좌관이 감동을 받아서 보관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명언의 품격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대결했던 2008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지명 수락 연설을 하고 있는 존 매케인 상원의원. 공화당전국위원회(RNC) 홈페이지
베트남전에는 오히려 참가하지 않은 것이 정치인에게 이득이 됐습니다. 베트남전에 대한 반대 기류 때문입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베트남전을 기피하고 반전운동을 벌였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지만 대선에서 승리했습니다. ‘아들 부시’인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징집 대상이었지만 국내에서 복무하는 편법으로 전쟁을 피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영장을 다섯 차례나 연기해 군대에 가지 않은 사실을 자랑스럽게 공개했습니다.
반면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정치인들은 이런 사실을 애써 공개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에 반기를 든 것이 고(故) 존 매케인 상원의원입니다. 2000년, 2008년 등 두 차례 대선에 출마한 그는 “패한 전쟁에 참가한 것은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베트남전 경험을 공개했습니다.
“I fell in love with my country when I was a prisoner in someone else‘s. I loved it because it was not just a place but an idea, a cause worth fighting for.”
(나는 다른 나라의 전쟁에 포로로 잡혀 있으면서 내 나라를 사랑하게 됐다. 조국은 단지 장소가 아니라 싸워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이념이고 명분이기 때문에 사랑한다)
매케인 의원의 2008년 공화당 대선 후보 지명 수락 연설입니다. 베트남전에서 5년간 포로로 잡혀 고문을 당하는 고초를 겪으면서 조국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는 내용입니다. 애국심에 약한 미국인들로부터 열렬한 박수를 받았습니다. 베트남 참전용사 출신 정치인 중에서 영웅 대접을 받는 것은 매케인 의원이 유일합니다.
실전 보케 360
최근 미시건에서 열린 중간선거 지원유세에서 연설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백악관 홈페이지
‘말조심’을 해야 하는 현직 대통령의 부담이 없는 오바마 대통령은 화끈한 연설로 분위기를 달아오르게 하고 있습니다. 최근 미시건 유세에서 선거 사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정조준했습니다.
“I took my lumps.”(나는 고통을 감수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하기 위해 자신의 선거 패배 경험을 소환했습니다. 그는 2000년 하원의원에 도전했다가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 패한 적이 있습니다. 정치 입문 초기에 겪은 쓰라린 경험이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당시 경험을 얘기하며 “나는 고통을 달게 받았다”고 했습니다.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투표 사기를 주장하며 워싱턴 의사당 난입 사태까지 초래한 트럼프 대통령이 비겁하다는 의미입니다
‘lump’(럼프)는 ‘덩어리’라는 뜻으로 ‘고통’ ‘치욕’ 등을 의미합니다. ‘take lumps’는 ‘덩어리를 삼키다,’ 즉 ‘고통을 감내하다’는 의미입니다. ‘lump’는 쓰이는 곳이 많습니다. “How many lumps do you like?” 미국인들이 커피나 차를 대접할 때 자주 쓰는 말입니다. “각설탕을 몇 개 넣어줄까”라는 뜻입니다. ‘혹덩어리’라는 뜻도 있습니다. 여성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I feel a lump in my breast”라고 하면 “가슴에 혹이 만져진다”라는 뜻입니다.
이런 저런 리와인드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장기 연재된 ‘정미경 기자의 이런 영어 저런 미국’ 칼럼 중에서 핵심 아이템을 선정해 그 내용 그대로 전해드리는 코너입니다. 2018년 8월 7일에 소개된 6·25전쟁 영웅에 대한 내용입니다. 미국 워싱턴 내셔널몰에 있는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 한국 지도급 인사들이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꼭 들르는 곳이다.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 재단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180807/91401742/1
북한으로부터 인수 받은 6·25전쟁 참전 미군 전사자 유해 봉환식이 하와이에서 열렸습니다. 아 자리에서 마이크 펜스 부통령은 미군 전사자들을 “영웅”이라고 부르며 최고의 경의를 표했습니다. 펜스 부통령의 아버지도 한국전 참전용사였습니다. 펜스 부통령 연설의 중요 부분을 정리했습니다.
“Some have called the Korean War the ‘forgotten war’. But today, we prove these heroes were never forgotten.”
(누군가는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영웅들이 결코 잊혀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펜스 부통령은 연설 초반에 ‘forgotten war’(잊혀진 전쟁)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잊혀진 전쟁’을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정치적 성향을 초월해 한국전쟁을 ‘unforgotten war’(잊혀지지 않는 전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습니다.
워싱턴 특파원 시절 많은 한국전 참전용사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기념비 설립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한국전쟁을 널리 알리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80, 90대 나이의 할아버지들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을 보면서 왠지 안쓰러웠습니다. 참전용사들에 따르면 한국전을 알리는 일에는 많은 장애요소가 있습니다. 미국이 참전했던 다른 전쟁들과 형평성을 가지려면 한국전만 튀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예상외로 강력하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한국전의 위상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한국이 해줄 일은 없는지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Today our boys are coming home.”
(오늘 우리 용사들이 돌아옵니다)
워싱턴에서는 매년 10여 개의 한국전 기념행사가 열립니다. 미군 참전용사 대부분은 거동이 불편하지만 지팡이를 짚고 휠체어를 타고 워싱턴에 집결합니다. 참전용사들의 손에는 앨범이 한 권씩 들려 있습니다. 앨범 속에는 언제 포탄이 떨어질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도 웃고 있는 청년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한 할아버지 앨범에서 젊은 한국 여인의 사진도 봤습니다. 주둔했던 마을에서 좋아했던 여인이라고 합니다.
참전용사들은 전후 한국의 놀라운 발전상에 감격스러워합니다. 그들의 얘기는 대부분 무용담으로 시작해 아쉬움으로 끝납니다. 전쟁터에 남겨두고 온 동료에 대한 미안함에 우는 할아버지들도 있습니다. 펜스 부통령이 연설 마지막 부분에서 한 말입니다. “Our boys are coming home.”(우리 용사들이 돌아온다) 참전용사 가족들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