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 위기 기업 늘어, 구조조정 시점 왔지만 시장 자생력 갉아먹는 관치금융 폐해 여전 정부, 시장개입 원칙 정해 효율적 조정 나서야
이지홍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금리 인상과 실물경기 침체의 여파가 자금시장으로 번지고 있다. 대기업과 공기업마저 채권 발행에 실패하는 ‘돈맥경화’ 사태가 발생했다. 경제 위기란 것이 본래 부실을 정리하라는 시장의 신호이기도 하지만 이러다 건실한 기업까지 단기 유동성 문제로 무너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정부가 선제적으로 옥석 가리기와 구조조정을 준비해야 한다는 주문이 나오고 있다.
사실 이번 위기가 닥치기 전부터 한국 경제엔 부실이 급속히 쌓이고 있었다. 돈을 풀어 폭탄이 터지는 걸 막고 있었을 뿐이다. 한 집계에 따르면 외부 감사를 받는 2만여 개 비금융 기업 중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 갚는 ‘좀비기업’ 수는 2017년 1853개에서 2021년 2823개로 급증했다. 긴축 시작도 전에 상황이 이랬다면 올해, 내년엔 어떻겠는가. 기업부채뿐 아니라 가계부채와 정부부채도 감당키 힘든 수준으로 늘었다. 인플레이션과 싸워 이기려면 금리가 다 오른 후에도 고금리 상태를 장기간 유지해야 한다. 구조조정을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시점이 다가온 것이다.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면 옥과 돌은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의 부군(夫君)이자 2001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조지 애컬로프는 옥석 가리기가 풀어야 하는 구조적 딜레마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장기화되는 고금리와 경기 침체는 자금시장을 악성 ‘레몬시장’으로 몰고 간다. 지난주 생중계된 정부의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선 한국의 주력 수출사업들이 나름 호조를 보이고 있다는 여러 부처 수장들의 장밋빛 보고가 넘쳤다. 하지만 지금 국민을 노심초사하게 만드는 ‘비상함’의 원인은 긴축의 시대를 버티기 힘든 레몬들이 너무도 많고, 심지어 잘나가는 복숭아까지 레몬들과 뒤섞일 수 있다는 우려다. 정부는 과연 준비가 돼 있는가.
명심할 점은 그 어떤 정부도 옥석 가리기에 특별히 능하지 못하단 현실이다. 윤석열 정부는 대기업과 수출기업을 복숭아로 보고 있다. 틀리진 않았다. 이들이 평균적으로 중소기업과 내수기업보다 생산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장도 이를 모르는 바 아니다. 애컬로프의 레몬시장 이론이 중요한 건 시장 실패를 규명해서만이 아니다. 시장이 어떻게 스스로 자금 경색 문제에 대처하고 또 어떻게 정부 개입이 시장 실패를 악화시킬 수 있는지, 후학들이 규명하게끔 길을 터준 게 애컬로프다.
실제 이번에 민간 기업의 돈줄을 마르게 한 주범도 정부다. 한국전력의 눈덩이 적자와 대규모 회사채 발행, 견제·감시가 부족한 지방자치단체의 수상한 부실덩어리 토건사업. 무능한 정치와 무책임한 포퓰리즘이 레몬을 양산하고 국가 경제를 사지(死地)로 내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한국 금융시장은 조금이라도 사고가 터지면 정부부터 쳐다본다. 레몬 문제를 부추기고 시장의 자생력을 갉아먹는 관치금융의 고질적인 폐해다. 이번에도 결국 한국은행이 나서서 급한 불을 꺼야만 했다. 다음엔 더 크고 더 센 충격이 닥칠 텐데 그땐 대체 어쩌려는지 의문이다.
지금은 과거의 산업구조를 마냥 부여잡고 있을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될 시기다. 인플레와의 전선(戰線)이 흔들려서도 안 된다. 재정 여력이 제한적인 만큼 효율적인 옥석 가리기가 더 시급해졌다. 문제는 레몬이 스스로 레몬이라고 밝힐 리 없다는 점이다. 강원도가 레고랜드 채무 디폴트를 선언하자 일제히 터져 나온 아우성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놀란 다른 지자체들은 빚과 지출을 줄이느라 분주해졌다. 진즉에 했어야 할 일이다. 고양이 목에 진짜로 방울을 다는 건 정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손’이다.
이지홍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