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재해법에 고령자 기피 심화 “일 주려면 서약서 내고 결재받아야 나이 제한, 최근 60세까지 내려가” 새벽 인력시장 허탕 일용직 늘어
이른 새벽 일거리 구하는 근로자들 지난달 27일 오전 5시경 서울 구로구 남구로역 인근 인력시장에서 일용직 근로자들이 일거리를 구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현장에서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고령 근로자들이 건설현장 일거리를 구하기가 어려워졌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손준영 인턴기자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건설 일용직으로 일해 온 안창배 씨(66)는 올해 새벽 인력시장에 나가도 일을 구하지 못하고 허탕 치는 일이 부쩍 늘었다. 1월 27일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뒤부터 건설현장의 ‘고령자 기피’ 현상이 더 심해졌기 때문이다. 안 씨는 “큰 현장일수록 혈압 검사 등 조건이 까다로워서 이런 곳엔 아예 갈 생각도 안 한다”고 전했다.
3일 인력중개업소 등에 따르면 올해 들어 고령 근로자들이 건설현장에서 일자리를 얻는 게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중대재해처벌법에 따라 근로자 사망 등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원도급 기업의 최고경영자(CEO)까지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이 때문에 건설사들이 기존에도 선호하지 않던 고령 인력을 사고 위험이 높다고 보고 더욱 기피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본보 취재진이 지난달 27일 서울 구로구 남구로역 인근 인력시장에서 만난 고령의 일용직 근로자들은 일거리 구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고 입을 모았다. 유정남 씨(73)는 이날 오전 4시에 나왔지만 3시간 동안 일을 얻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45년 경력자인 그는 “현장까지 가서 건강진단서를 보여줘도 그냥 돌아가라고 한 적도 있다”고 전했다.
현장 인력을 채용하는 하도급 기업들은 인력난이 심해 고령 인력이 아쉬운데도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다. 비전문취업비자(E-9)로 일하는 외국인 건설 근로자가 2019년 말 8100명에서 올해 9월 기준 5600명으로 줄어드는 등 건설현장의 인력난은 심각한 상황이다.
건설 하도급 업체 인력 담당자인 임모 씨(46)는 “원도급이 정한 나이 제한이 원래는 65세였는데 요즘은 60세까지 내려가고 있다”며 “고령자를 쓰려면 우리가 원도급에 ‘관리 잘하겠다’는 서약서를 내고 결재 받아야 하는 실정”이라고 전했다. 대한전문건설협회 관계자는 “젊은층 유입은 없는데 원도급에서 자꾸 나이 제한을 해 인력 운용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사고를 줄이려는 중대재해처벌법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이로 인해 고령자가 고용시장에서 차별 받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나이를 기준으로 제약을 두기보다 신체 능력을 테스트하는 등의 대안이 필요하다”고 했다.
손준영 인턴기자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