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스토리의 힘’ 한국 영화 리메이크 전세계 돌풍 베트남판 ‘극한직업’ 2주간 1위 ‘끝까지 간다’ 원작 佛 ‘레스틀리스’… 넷플릭스 영화부문 1위 기록도 한국영화 참신한 이야기 강점… 가족 가치 앞세운 내용도 어필 세계 각국에 동시 판매 늘어… 단순 판권 판매서 공동제작 전환
앞서 베트남에서도 한국 영화 리메이크작의 흥행 소식이 전해졌다. ‘극한직업’(2019년)의 베트남판 ‘극이직업’(매우 쉬운 직업)이 올해 4월 말 개봉한 후 2주간 베트남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른 것. 원작의 주인공 형사들이 치킨집을 위장 운영하는 것과 달리 베트남판은 베트남 국민음식 ‘껌떰’ 가게를 운영하는 것으로 설정을 바꿔 현지 관객을 공략했다. 그 결과 관객 86만 명을 모으며 올해 베트남에서 개봉한 자국 영화 중 3위에 올랐다.
○ 흥행 입증된 한국 영화 리메이크 봇물
올해 2월 25일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동시 공개된 프랑스 영화 ‘레스틀리스(Restless)’는 할리우드 대작들을 제치고 같은 달 26일부터 닷새간 영화 부문 스트리밍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이 영화는 2014년 개봉한 ‘끝까지 간다’를 리메이크한 것. 9월엔 ‘수상한 그녀’(2014년)를 스페인어판으로 리메이크한 작품이 북미와 멕시코에서 개봉됐다. 영화 ‘청년경찰’(2017년)은 일본 NTV 드라마 ‘미만경찰 미드나잇 러너’로 리메이크돼 올해 6∼9월 방영됐다. 이 드라마는 최고 시청률 11.2%를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특히 해외 영화사들은 다 만든 영화의 개봉을 미뤄야 했던 팬데믹 기간, 본의 아니게 생긴 시간을 활용해 한국 영화 중 흥행이 증명된 작품의 리메이크 판권을 미리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팬데믹 기간 ‘오징어게임’을 선두로 K콘텐츠가 메가 히트 수준의 인기를 끌며 위상과 신뢰도가 동시에 올라간 것을 계기로 리메이크 판권 확보 경쟁은 한층 더 치열해진 분위기다.
‘7번방의 선물’ 배급사인 NEW의 자회사로 해외 판매를 전담하는 콘텐츠판다의 이정하 이사는 “팬데믹 기간 한국에서 흥행이 입증돼 리메이크를 할 경우 위험을 줄일 수 있는 이야기를 찾는 추세가 눈에 띄게 강화됐다”며 “팬데믹 기간 해외 바이어들의 리메이크 판권 구매 관련 문의가 특히 많았다”고 했다.
○ 북미, 유럽, 중동까지… 리메이크 대륙별 ‘도장 깨기’
특히 ‘수상한 그녀’는 리메이크 판권을 사간 뒤 현재 기획개발 중인 독일과 영어 버전 제작을 준비하고 있는 미국 등 리메이크판이 개봉됐거나 리메이크가 추진 중인 버전만 총 9개에 달한다. 미국 아마존은 지난해 액션 영화 ‘악녀’(2017년)의 판권을 구매한 뒤 TV시리즈로 리메이크를 준비하고 있다. ‘끝까지 간다’의 투자배급사인 쇼박스 안정원 해외사업팀 이사는 “팬데믹 기간 ‘오징어게임’이 뜨면서 수많은 국가에서 기존보다 더 다양한 장르의 한국 영화에 대해 판권 구매를 문의하고 있다”며 “리메이크 판권에 관심을 갖는 국가가 다양해지는 경향이 확실히 두드러진다”고 했다.
○ K스토리 독창성에 전 세계 열광
해외에서 한국 영화 리메이크에 나서며 K스토리에 열광하는 이유로는 다양성과 독창성이 꼽힌다. 박기수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할리우드는 이야기 창작을 최소 7, 8명 이상이 함께 하는 집단 창작 시스템을 갖췄다”며 “이런 시스템에선 이야기가 둥글어지고 튀는 이야기는 거의 수용되지 않는다”라고 했다. 이어 “한국은 혼자 또는 소수가 이야기를 만드는 구조여서 그만큼 참신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7번방의 선물’ ‘수상한 그녀’ 등 리메이크 인기작들이 가족의 가치를 중시하는 내용이라는 점도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강성률 광운대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는 “신자유주의의 확산으로 갈수록 살기가 어려워지면서 세계인이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K스토리에서 보편적인 위안을 얻는 듯하다”며 “할리우드가 가족 이야기를 전 세계에 보편화시켰는데, 한국은 이를 활용하면서도 할리우드와 전혀 다른 문법으로 구성하는 점, 특히 비극적 정서를 깔고 있는 점이 세계인의 흥미를 자극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 공동제작으로 리메이크 주도
K스토리가 인기를 얻으면서 한국 영화 리메이크 방식이 판권만 판매하던 것을 넘어 아예 한국 원작자 측이 해외에서 제작을 주도하는 공동제작 방식으로 고도화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베트남판 극한직업이 대표적이다. 이 영화의 공식 국적은 베트남. 그러나 자세히 보면 한국 영화로 볼 만한 부분이 많다. 영화는 CJ ENM이 베트남 현지에 만든 합작 법인 CJ HK가 베트남 현지 제작사와 함께 만들었다. 봉준호 감독이 연출한 영화 ‘마더’(2009년)도 미국에서 공동제작 방식을 통한 리메이크가 추진되고 있다. 국내 투자배급사 NEW도 스릴러 영화 ‘숨바꼭질’(2013년)을 일본과 이 같은 방식으로 리메이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원작자 측이 직접 리메이크판 제작에 참여할 경우 원작이 가진 고유의 결을 비롯해 흥행의 핵심 요인을 그대로 가지고 가면서도 현지 특색을 반영해 적정 수준 변주하는 현지화 전략으로 흥행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고경범 CJ ENM 해외사업부장은 “한국 영화시장은 이미 포화돼 성장에 한계가 있는 만큼 한국에서 이미 검증된 이야기로 리메이크를 주도하는 방식으로 글로벌 사업을 확대하는 것”이라며 “베트남 등 아시아는 물론이고 튀르키예 등 세계 곳곳에서 공동제작 성공 사례가 축적되면서 다음 리메이크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기반이 점점 확대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영화 스토리텔링, 세계 모든 사람에 감동… 판권확보 경쟁 치열”
인도네시아 제작자들이 본 K영화
“한 편에 인간애-우정까지 담겨… 최근에만 리메이크 5편 개봉”
한국 영화 ‘7번방의 선물’(2013년)의 인도네시아판인 ‘7번방의 기적’을 연출한 하눙 브라만티오 감독이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교도소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 피티팰컨 제공
브라만티오 감독은 “원작 ‘7번방의 선물’은 연출이 워낙 훌륭했고 연기력 역시 굉장해 원작과 같은 수준을 구현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크게 흥행할 거라는 생각은 못 했다”고 했다. 브라만티오 감독이 당초 예상한 관객 수는 100만∼150만 명. 그는 “이 영화의 흥행이야말로 나에겐 진짜 기적”이라고 말했다.
인도네시아판은 아동을 유괴하고 살해했다는 누명을 쓴 주인공 용규(류승룡)와 딸 예승(갈소원)의 절절한 이별 장면이 비중 있게 들어가는 원작과 달리 감옥에서의 코미디에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브라만티오 감독은 “슬픈 장면보다 웃긴 장면에 집중했음에도 관객들은 함께 어우러져 울고 웃으며 영화를 보더라”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인도네시아 현지 제작사이자 배급사 ‘피티팰컨’의 프레데리카 프로듀서는 “한국 영화의 스토리텔링 방식은 세계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킨다”며 극찬했다. 그는 ‘7번방의 선물’을 리메이크하게 된 이유로 “이야기가 훌륭했다”며 “부녀의 끈끈한 관계와 인간애, 우정이 한 영화에 모두 담겨 있다”고 했다.
엔데믹 국면을 맞아 인도네시아 영화시장에서 한국 영화 리메이크 경쟁이 한층 더 치열해진 분위기도 전했다. 피티팰컨은 귀신을 보는 남자 이야기를 그린 한국 영화 ‘헬로우 고스트’(2010년)의 인도네시아판도 내년에 개봉한다. 그는 “최근에만 한국 영화 리메이크작이 5편이나 나왔다”며 “한국 영화 판권 확보 경쟁은 때로 심각할 정도로 치열하지만 훌륭한 이야기를 찾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고 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