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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빛 절정 치닫는 ‘가을의 전설’… 천년을 더 청춘으로 살아가려나[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입력 | 2022-11-05 03:00:00

[여행 이야기]풍채 좋은 은행나무 고목
‘노란 잎비’ 800번 원주 반계리 나무
당상관 품계 받은 양평 용문사 나무
마음까지 밝게 물들이는 나무들



강원 원주시 문막읍 반계리 은행나무는 수령 800년의 천연기념물이다. 찬 바람이 불면서 은행잎이 꽃비가 되어 흩날리고, 나무 아래엔 노란색 카펫이 깔린다.


‘살아 있는 화석’으로 불리는 은행나무는 수명이 길다. 전국에서 천연기념물이나 보호수로 지정된 노거수(老巨樹) 중에서는 은행나무가 가장 많다. 현재 전국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는 서울 성균관 문묘 은행나무, 경기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강원 원주시 반계리 은행나무 등 모두 25그루다. 향교나 서원, 절은 물론 동네 어귀를 호위무사처럼 지키고 있는 은행나무는 1년에 딱 한 번 이맘때 황금색 ‘잎비’를 내린다. 그리고 노란색 이불을 환하게 깐다. 일천 번이나 장엄한 잎비를 내린 천년 고목 은행나무는 말 그대로 ‘가을의 전설’이다.
○천년 고목이 던지는 지혜와 위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키가 큰 경기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은행나무는 2억7000만 년 전, 늦춰 잡아도 공룡시대인 쥐라기 이전부터 지구에 터를 잡아왔다. 공룡이 바라보던 그 은행나무가 지금도 거의 진화하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살아남은 것이다. 그래서 찰스 다윈은 은행나무를 두고 ‘살아 있는 화석(living fossil)’이라고 칭했다. 세계 최고령 은행나무는 중국 구이양(貴陽) 서쪽에 있는 수나무로 수령이 4000∼4500년쯤 된다고 한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의 수령은 1100년가량이다.

1일 원주시 문막읍 반계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176호) 앞에는 평일인데도 아침부터 장엄한 단풍을 보러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은행잎은 아침 햇살이 비치자 투명한 황금빛으로 반짝이며, 바람이 불 때마다 춤을 춘다. 수령 800∼1000년으로 추정되는 반계리 은행나무는 높이 32m, 최대 둘레 16.27m에 이른다. 한 그루의 나무인데도 마치 10여 개의 나무가 한꺼번에 자라서 이룬 숲처럼 보인다.

나무 주변을 한 바퀴 돌면 사방으로 뻗어나간 가지가 만들어낸 넉넉한 풍채와 변화무쌍한 위용을 볼 수 있다. 반계리 은행나무는 불꽃처럼 타오르다가 버섯처럼 솟아오르는가 하면, 한쪽 방향으로 휘청이기도 한다. 뒤쪽으로 돌아가면 엉덩이처럼 둥그런 두 덩어리로 서 있는 모습이 앙증맞기도 하다. 가슴 아픈 사건이 많은 스산한 가을에 은행나무의 넉넉하고 넉넉한 품은 커다란 위안을 준다. 경건한 마음으로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가을이 깊어갈 때 우리의 마음도 익어가길 기도한다.

은행나무는 국내에 불교가 전래될 때 중국에서 함께 들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오래된 은행나무는 스님이 지팡이를 꽂으니 자랐다는 등 신비로운 전설도 간직하고 있다.

양평 용문사에는 아파트 14층 높이인 은행나무가 있다. 높이는 42m, 수령은 1100여 년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살았고, 가장 키가 큰 나무다. 신라의 마지막 세자 마의태자가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심었다고도 하고,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으니 은행나무로 자랐다는 말도 있다. 세종 때는 장차관급인 정3품 당상관 품계를 받을 만큼 중히 여겨졌다. 화재로 타버린 천왕문 대신 은행나무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어 천왕목(天王木)으로 불린다. 1일 용문사 은행나무는 ‘잎비’를 내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노란 단풍잎이 눈처럼 흩날리는 영화 같은 풍경이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떨궈 버리는 장면인데도 천년 고목은 조금도 품위를 잃지 않았다. 길어봐야 백년 남짓 사는 사람에게, 천년 세월 동안 범상치 않은 모습으로 우리 곁을 지켜온 은행나무의 정신적 가치는 어떤 것과도 비교 불가다. 나도 노거수처럼 늙어가고, 언젠가 저렇게 떠나가기를 소망해 본다.
○노란 카펫이 깔리는 신비한 공간
수백 년 묵은 은행나무를 보러 멀리서 찾아왔는데 단풍잎이 거의 다 떨어졌다고 실망하긴 이르다. 나무 아래 형광색으로 환하게 깔린 은행잎을 보는 것만으로 일상에서 맛볼 수 없는 환희를 느낄 수 있다. 서울의 가로수 은행나무는 단풍잎이 떨어지는 대로 치우기 바쁘지만, 절이나 향교, 서원에 있는 단풍잎은 노란색 카펫으로 남아 오랫동안 특별한 감흥을 던져준다.

단풍잎이 떨어져 깔리면 더욱 아름다운 경남 밀양 금시당 은행나무.

경남 밀양시의 금시당이 대표적이다. 금시당에는 오히려 단풍잎이 다 떨어진 11, 12월에 전국에서 사진을 찍으러 사람들이 몰려든다. 금시당은 조선 명종 때 좌부승지를 지낸 이광진(1517∼?)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 고향에 돌아와 1566년에 지은 별장이다. 이광진이 직접 심은 은행나무의 단풍잎이 거의 다 떨어진 후 금시당은 노랑 물감을 쏟아부은 듯 환상적인 공간으로 변신한다. 경북 영주시 부석사의 일주문부터 안양루와 석등, 무량수전으로 향하는 길도 은행나무 단풍잎이 카펫처럼 깔린 황금터널이 극락세계로 인도한다.

1996년에 개봉한 강제규 감독의 영화 ‘은행나무 침대’에서 궁중악사 종문(한석규)과 미단 공주(진희경)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다 죽은 뒤 암수 은행나무 두 그루로 환생한다. 그리고 1000년 뒤에 미단 공주의 은행나무는 침대로 만들어지고, 은행나무에 깃들인 미단 공주의 영혼이 현실에서 나타나 벌어지는 판타지 스토리다. 이 영화에서 보듯이 은행나무는 암수가 구별된다. 암나무에서만 은행나무 열매가 열린다. 그래서 어느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나는 은행알 때문에 멀쩡한 암나무 가로수를 베어내기도 한다.

서울 성균관 문묘 담장 너머로 보이는 수령 400년 은행나무.

서울 성균관 문묘(文廟)에는 수령 약 400년의 은행나무가 유명하다. 문묘 은행나무는 인천 강화군 전등사, 강원 강릉시 주문진읍 장덕리 은행나무와 함께 암나무에서 수나무로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공부와 수행, 일상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냄새를 뿜는 열매가 맺히니, 제발 열매를 맺지 않게 해달라고 제사를 거듭 드리자 성별이 바뀌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다.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문묘 은행나무의 단풍은 담장 밖에서 명륜당 기와지붕의 곡선과 함께 사진을 찍어야 더 멋있다.

성균관처럼 옛 선비들이 공부하는 향교나 서원에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는 이유는 공자가 산동성 곡부에서 제자들과 강학했던 행단(杏檀)의 고사 때문이다. 송나라 때 공자의 45대손인 공도가 이곳에 살구나무를 심었고, 금나라 때에는 행단이라 쓴 비를 세웠다. 행(杏)은 살구나무라는 뜻도 있지만 은행나무라는 의미도 있다. 조선의 선비들은 행단의 나무를 은행나무로 여겨 배움의 공간 곳곳에 사대부의 상징물로 심었다.

수령 800년이 넘은 은행나무 중에서 가장 넓은 수폭을 지닌 인천 장수동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562호 인천 남동구 장수동 만의골 은행나무는 자연 생태 모양을 그대로 유지한 타원형의 아름다운 수형을 이루고 있다. 지난달 말에 찾아갔을 때 아직 단풍이 충분히 들지 않았는데, 초록색 바탕에 일부 노란색 단풍이 폭포수처럼 층층이 쏟아져 내리는 모습이 더욱 선명해서 아름다웠다. 장수동 은행나무는 수령 800년 이상 된 은행나무 중 수폭(나무넓이)이 가장 넓어 커다란 그늘을 만들어 낸다.

경북 안동시 길안면 용계리 은행나무는 가장 비싼 은행나무로 회자된다. 1990년 당시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은행나무는 수몰 위기에 처했지만 60억 원을 들여 4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옮겨 심어 700년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당시 나무를 들어 올리니 무게가 680t이나 나갔다고 한다.

해마다 은행나무가 떨군 노랑 단풍으로 카펫을 까는 아름다운 길은 전국에 산재해 있다. 강원 홍천군 내면 광원리를 비롯해 충북 괴산군 문광저수지 은행나무길, 충남 보령시 청라면 오서산길, 전남 담양군 수북면 대방리 나주시 남평읍, 경남 거창군 거창읍 의동마을, 경북 경주시 서면 도리마을 등이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충남 아산시 곡교천 은행나무길은 말 그대로 황금터널이다. 산림청과 생명의 숲 국민운동본부가 공동 주관한 제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아름다운 거리숲’ 부분에 선정된 길이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