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 통제 ‘제복의 권위’만 가능, 사고 직전 ‘임기응변’은 불가능 치밀하고 반복적인 시뮬레이션과 통일된 지휘계통만이 참사 예방
천광암 논설실장
“초등학생도 알 수 있게 쉬운 말을 쓸 것, 문장을 45자 전후로 짧게 쓸 것, 복문을 쓰지 말 것. 접속사를 사용해서 단문을 이어 붙일 것, 영어처럼 결론부터 말할 것, 구와 구 사이에는 1초 이상,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2초 이상의 간격을 둘 것….”
일본 효고(兵庫)현 경찰본부가 2002년 제작한 ‘혼잡 인파 경비 매뉴얼’ 한 페이지에 실린 내용 중 군중 안내·통제 멘트의 작성지침에 해당하는 대목이다. 매뉴얼은 이 밖에도 사고예방을 위한 상세한 요령을 107쪽에 걸쳐 담고 있다.
이 매뉴얼이 만들어진 계기는 2001년 7월 효고현 아카시(明石)시에서 발생한 불꽃놀이 관람객 압사 참사다. 양방향에서 밀려든 인파 때문에 육교 위에서 불꽃놀이를 보던 관람객 11명이 목숨을 잃고 200여 명이 다쳤다.
일본에서는 아카시 참사 후 11일 만에 법률·위기관리·건축·방재·구급의학 전문가들로 구성된 조사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했다. 위원회는 6개월간 독립적인 조사 활동을 한 끝에 142쪽 분량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아카시 불꽃 축제는 시(市)가 주최를 했고 137명의 인력을 투입해 경비를 담당했던 민간 전문업체가 별도로 있었지만, 보고서는 참사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곳으로 경찰을 지목했다.
“현장에서 관람객에게 강제력을 갖고 대응할 수 있는 것은 제복 입은 경찰관과 기동대인 것이다. 혼잡 인파 경비의 경우 자체 경비가 원칙이라지만 그것을 조직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을 경찰에게만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경찰의 책임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보고서는 경찰의 잘못과 관련해서는 컨트롤타워 공백을 큰 문제로 꼽았다. “총괄지휘를 해야 할 서장과 부서장이 현장 텐트가 아닌 경찰서에 있었다. 이래서는 사고가 일어나기 직전, 사고 발생 순간, 사후 대응에 이르기까지 경찰력을 집중하기 곤란했다.”
통일된 지휘계통과 치밀한 사전 시뮬레이션만이 사고를 막을 수 있다고 보고서는 강조한다. “사고가 발생한다는 전제를 세워 놓고, 어떤 시나리오에 따라 일어날지를 예측하는 것, 이른바 시나리오 기법을 활용해 ‘위험 포인트’를 추출하고, 그것을 어떻게 해소할지 사전협의를 진행해야 한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1일 고강도로 수사와 감찰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랬던 장본인이 압사 사고 희생자들이 앰뷸런스와 길 위에서 생사를 넘나들던 시간에 술을 마시고 잠들어 있었던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참사 다음 날 “경찰과 소방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일찌감치 지휘부의 책임론에 선을 그은 것이다.
윤 청장이나 이 장관의 발언에 내비치는 의도대로 수사·감찰이 진행된다면 총경 몇 명과, 현장에서 몰려드는 인파를 통제하고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려고 목이 터지게 부르짖던 현장 경찰관들에게만 책임이 돌아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임기응변을 제대로 하지 못한 죄일 것이다.
앞서 아카시 참사 조사위원회 보고서는 아카시 참사를 포함해 일본에서 있었던 6건의 대형 혼잡 인파 참사를 분석한 결과를 이렇게 요약했다. “이상의 사고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사고 발생 직전 현장에서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