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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환 광부 “갱도내 전혀 쓸일 없는 비닐 발견… 하늘이 도운 것”

입력 | 2022-11-07 03:00:00

[매몰 광부 생환]
“죽는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 없습니다.”
광산매몰 9일만에 생환 박정하씨
“랜턴 방전 절망속 발파소리 들려”




경북 봉화군 아연광산 매몰 사고 현장에서 221시간 만에 구조된 작업조장 박정하 씨(62)가 6일 오후 안동병원에서 눈 보호를 위해 착용했던 안대를 벗고 저녁 식사를 하고 있다. 안동=뉴스1

“죽는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 없습니다.”

경북 봉화군 아연광산 매몰 사고로 고립됐다 221시간 만에 기적적으로 생환한 작업조장 박정하 씨(62·사진)는 6일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처음부터 어떻게든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박 씨는 지난달 26일 오후 6시경 광산 내 제1수직갱도에서 발생한 매몰 사고로 보조작업자 박모 씨(56)와 함께 지하 190m에 고립됐다가 4일 오후 11시 3분경 극적으로 구조됐다. 박 씨는 사고 직후를 떠올리며 “입사하고 며칠 안 된 동생(보조작업자 박 씨)은 당황하고 놀라더라. 하지만 저는 당황하면 안 되고 침착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고 설명했다.

박 씨는 작업에 나서며 가져간 커피믹스 30여 봉을 지하수에 타서 동료와 나눠 먹으며 나갈 방법을 찾았다.


하지만 열흘째 고립이 이어지고 설상가상으로 4일 오후 헤드랜턴의 배터리까지 바닥나면서 둘은 다시 암흑에 갇혔다. 박 씨는 “갑자기 절망감이 밀려와 동생과 부둥켜안고 우는데 어디선가 발파 소리가 들렸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15∼20분이 지난 후 불빛이 보이면서 “형님!” 소리가 들리며 구조팀과 마주쳤다. 박 씨는 “구사일생이란 말을 절실히 느꼈다”며 “사고 후 이태원 참사 소식을 듣고 마음이 많이 아팠다. 국민적 아픔이 이어지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응원해주신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겠다”고 했다.




박정하 씨가 전한 221시간

“나무와 비닐 이용해 천막 만들어
폭약-곡괭이로 신호 보내고 길 찾아
응원해준 분들께 감사하며 살겠다”





박 씨는 매몰 사고가 벌어진 지난달 26일 오후 6시 상황에 대해 “갱도 상부에서 흙과 모래가 2시간가량 쏟아져 내렸다”며 “한참 기다렸다 위를 올려다보니 꽉 막혀 탈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증언했다.

박 씨는 “이 일은 긴장의 끈을 한시도 놓을 수 없는 ‘극한직업’이라서 마음의 대비는 늘 하고 있었다”며 “일단 별것 아닌 일처럼 대하면서 동생(박 씨)이 평정심을 찾을 수 있도록 대처했다”고 했다.
○ 목재, 비닐, 커피믹스 활용해 생존
마음을 안정시킨 두 사람은 탈출구를 찾기 위해 갱도 안을 샅샅이 뒤졌다. 박 씨는 “헤드랜턴 배터리 용량을 감안해 동생과 번갈아 불을 켜 가며 탈출구를 찾았다”며 “하지만 바깥까지 연결될 만한 길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다음 날까지 이어진 ‘탈출구 찾기’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후 27년 경력 베테랑 작업자인 박 씨의 노하우와 생존 의지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먼저 갱도 천장을 떠받치거나 광차용 철도를 놓을 때 쓰고 버려진 목재를 샅샅이 모았다. 이 과정에서 폐비닐까지 확보했다. 박 씨는 “비닐은 갱도에서 쓸 일이 전혀 없는데, 우리를 돕기 위해 귀신이 가져다 놓아준 건가 싶을 정도로 놀랐다”며 “나무와 비닐을 이용해 천막을 만들어서 천장에서 떨어지는 지하수를 피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일종의 텐트를 쳐 체온을 유지했던 것이다.

조장 박 씨는 천막 안에서 모닥불도 피웠다. 근처에 있던 산소용접기를 이용해 물에 젖은 나무를 바짝 말린 뒤 불을 피우는 데 성공한 것. 당시 갱도 내부 기온은 평균 14도 정도로 쌀쌀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온도가 떨어지고 있었다. 박 씨는 “둘 다 작업복이 땀과 지하수로 흠뻑 젖었는데, 모닥불을 피운 덕에 추위를 피할 수 있었다”며 “천막 안에서 모닥불로 몸을 녹이면서 쪽잠을 자기도 했다”고 말했다.

작업 전 챙겨 온 커피믹스 30여 봉은 소중한 식량이 됐다. 박 씨는 “갱도 작업 지점에 커피포트가 있었다”며 “커피포트 아랫부분 플라스틱을 뜯어내 냄비를 만들어 물을 끓인 다음 커피믹스를 타 ‘저녁 밥 먹자’며 먹었다”고 했다. 이마저 3∼4일 만에 동이 나자 이들은 천장에서 떨어지는 지하수를 모아 마시는 식으로 굶주림을 참아가며 ‘버티기’에 돌입했다.
○ 1인실 마다하고 빠르게 회복
식량이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둘은 희망을 잃지 않고 끝까지 탈출을 모색했다. 조장 박 씨는 “탈출구를 확보해서 어떻게든 살겠다는 생각에 갖고 있던 폭약과 곡괭이를 챙겨 동생과 나섰다”고 말했다. 고립 닷새째인 지난달 30일이었다.

박 씨는 당시 폭약 25개를 소지하고 있었다. 평소 작업 시 대형 암석을 부술 때 이용했던 폭약이었다. 그는 “암석으로 막혀 있던 곳으로 가서 폭약 9개를 묶어 한 번에 터뜨렸는데, 효과가 없었다”며 “지상에서도 발파 소리를 듣고 구조 신호로 인식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고 했다.

틈틈이 두 사람은 곡괭이를 이용해 막힌 구간을 뚫기도 했다. 굶주려 기운이 없는 상황에서도 10m를 파내는 데 성공했지만 이 역시 탈출구가 되기엔 부족했다. 박 씨는 “폭약을 거의 다 소진한 상황에서 쇠파이프를 계속 두드리고 고함을 지르면서 맥이 빠질 때까지 도움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구조 직후 안동병원으로 이송된 두 작업자는 현재 식사를 하고 조금씩 걷기도 하는 등 빠르게 회복하고 있다. 9일간 죽음의 문턱을 함께 넘나든 이들은 병원 측이 제안한 1인실을 마다하고 2인실에서 함께 치료를 받기로 했다. 박 씨는 “퇴원하면 동생(박 씨)과 함께 닭백숙을 먹기로 했다”면서 “앞으로 광원들이 최대한 인간적인 노동 환경을 제공받을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봉화=명민준 기자 mmj86@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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