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한강변 압구정 동쪽에는 미상의 정자가 있었다. 1749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정자의 이름은 ‘숙몽정’. 한국화의 뿌리와도 같은 조선의 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은 정자 뒤로 펼쳐진 기암절벽 풍경과 정자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선비와 어린 아이를 그렸다. 지금은 없어진 이 정자는 정선의 그림 ‘숙몽정’(1700년대)으로 그 흔적을 짐작할 수 있다.
겸재 정선, 숙몽정, 일민미술관 제공
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은 ‘다시 그린 세계: 한국화의 단절과 연속’ 전시장의 가장 초입에 ‘숙몽정’을 놓았다. ‘한국화의 개념과 한국화의 기반이 되는 전통이 사라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질문을 은유한 셈이다. 출품작은 크게 소장품과 대여품으로 나뉘어있다. 소장품은 겸재 정선, 추사 김정희(1786~1856), 오원 장승업(1843~1897) 등 ‘고전’이라 칭해지는 예술가 24명의 작품 42점. 대여품은 ‘현대’라 불리는 동시대 작가 13명의 작품 69점이다. 한국적 재료나 소재를 작업에 이어가고 있는 작가들을 추렸다.
독특한 점은 전시 구성이다. 한데 섞여 있는 이 작품들을 구분하는 방법은 벽지 색이다. 전시의 주축이 되는 것은 회색 벽지다. 전시장은 툭툭 끊어진 회색 벽지와 그 사이로 다양한 색의 벽지들이 끼어있는 형식이다. ‘고전’ 작품은 회색 벽지에, ‘현대’ 작품이 그 사이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미술관 측은 “소장품과 대여품을 섞어 진열하면서 과거 속에서 현재를, 현재 속에서 과거를 살피며 한국화의 정의를 고민해봤으면 한다”고 말했다.
전시장 전경, 일민미술관 제공
정선의 ‘숙몽정’에서 시작한 고전 작품들은 시대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서예의 필선이 두드러지는 김정희의 ‘사시묵죽도사폭병’(1840년대)과 실험적인 구도와 담채법이 특징인 장승업의 ‘화조도’(1860년대)를 선두로 그들의 영향을 받은 이들의 작품이 펼쳐진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고전도 변화를 겪는다. 소나무와 아홉 명의 선비를 그린 고희동의 ‘송하관류도’(1927년)에서 발견되는 작아진 글씨나 설산 풍경을 그린 박승무의 ‘설청계방’(1940년대)에서 살펴볼 수 있는 장방형 비율이 대표적이다.
심향 박승무, 설청계방(雪晴谿邦), 일민미술관 제공
변화의 속도는 2층 전시장에서부터 더 빨라진다. 김은호(1892~1979)의 ‘미인도’(1940년) 등으로 대표되는 채색화가 등장하면서부터다. 일본 유학을 통해 서양화풍의 일본화에 영향을 받은 작가들은 1936년 ‘후소회’를 설립해 수묵산수화를 주로 그린 이상범(1897~1972)과 그의 제자들과 쌍벽을 이뤄갔다. 이 흐름은 1950년부터 한국화가들이 추상표현주의를 수용하면서 또 한번 큰 변화를 맞이한다. 서세옥(1929~2020)의 ‘춤추는 사람들’(1995년)이나 황창배(1947~2001)의 ‘새로 쓰는 선비론 삽화’ 시리즈(1997~1998년) 등은 단순한 선이 눈에 띈다.
서세옥, 춤추는 사람들, 일민미술관 제공
사실 시대 흐름에 따른 한국화의 변화 양상을 따라가기 쉬운 전시는 아니다. 분절된 회색 벽지 사이사이에 놓인 화려한 현대 작품들 때문이다. 마이클 잭슨의 모습을 한국화 구도로 그린 손동현의 ‘왕의 초상(P.Y.T)’(2008년), 불교 도상에서 모티브를 얻은 박그림의 ‘심호도’ 시리즈(2021~2022년) 등은 고전 작품처럼 담백함은 덜하지만 어딘지 친숙하다. 또 조선의 화가 윤두서와 정선의 그림을 재해석한 회화 ‘과거에 대한 고찰’(2021년)의 주인은 프랑스 출신 예술가 로랑 그라소(50)다. 시대와 국적을 뛰어넘어 발견되는 ‘한국적이라는 느낌’의 근원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박그림, 심호도, 일민미술관 제공
전시는 내년 1월 8일까지. 5000~7000원.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