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사물의 소멸’ 펴낸 한병철 씨
모든 사물이 인공지능으로 연결된 미래. 갑자기 완벽한 정전(停電)이 찾아온다면?
하늘에서는 비행기가 추락한다. 컴퓨터 화면은 순식간에 검게 변한다. 휴대전화도 작동을 멈춘다. 엘리베이터와 난방기, 냉장고도 사용할 수 없다. 미국 소설가 돈 드릴로가 장편소설 ‘침묵’(국내 2020년 출간)에서 묘사한 초연결사회의 종말이다.
‘피로사회’(2010년·문학과지성사)로 화제를 모았던 한병철 전 독일 베를린예술대 교수(63·사진)는 “지난달 벌어진 ‘카카오 데이터센터 화재’로 인한 데이터 재난 상황을 지켜보며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고 한다.
“소설 ‘침묵’ 마지막 장면에서는 고요와 공포가 느껴집니다. 진정 종말론적인 대목은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할 수 없음을 깨닫는 장면이에요. 사람들은 그제야 (컴퓨터와 휴대전화 없이) 대화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자각하죠.”
그는 우리 사회가 손에 잡히는 물건으로 둘러싸였던 “사물권의 시대”에서, 손에 잡히지 않는 새로운 정보가 끊임없이 흐르는 “정보권의 시대”로 바뀌었다고 분석했다. 실제 두터운 사진첩이 휴대전화 속에서 언제든 지워질 수 있는 ‘디지털 사진첩’으로 대체된 지 오래다. 그는 “이런 시대는 인간관계도 네트워크에서만 존재한다”고 했다. 팔로를 취소하면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어진 관계를 손쉽게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셜미디어는 온라인에서 인간관계를 무제한으로 연결시켰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외롭죠. 서로가 버튼만 누르면 언제든 서로를 처분할 수 있는 처지가 됐기 때문입니다.”
그는 음식, 영화를 넘어 좋아할 만한 친구까지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추천해주는 시대를 경계했다. 결국 이런 순응이 “인간의 주체성마저 소멸하게 만들 것”이라고 진단했다.
디지털 감옥에서 벗어날 방법은 뭘까. 그는 진정한 “관계와 접촉”이라고 답했다.
“필요에 의해 맺은 관계에서는 상대방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특정한 목적 없이 타인 그 자체에 집중해야 다름을 인정하고 진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인간 본연의 세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