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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차 연봉, 신입의 3배… “나중에 보상? 지금 일한만큼 받아야”

입력 | 2022-11-08 03:00:00

연공서열에 묶인 임금체계
MZ 72% “직무-성과급 전환 찬성”… 100인이상 사업체 56% 호봉제
늦게 승진한 동기가 연봉 더 받기도… “연공성 완화 임금체계 개편 시급”




《4차 산업혁명으로 달라진 일자리 환경에도 한국의 임금체계는 여전히 1987년 이후 강화된 호봉제에 머물고 있다. 저성장·고령화 시대에 근무연수 중심의 급여 체계는 한계에 부닥쳤다. MZ세대는 공정한 보상을 요구하고 나섰다. 전문가들은 고령자 고용, MZ세대의 공정 요구, 임금 격차 해소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을 해법으로 임금 개편을 꼽는다. 하지만 노사 간 이해관계가 복잡해 쉽지 않은 과제이기도 하다. 》


연공서열에 묶인 임금체계… ‘공정 보상’ 요구하는 청년들


대형 조선사에서 용접을 하는 10년 차 직원 A 씨는 지난해 연봉 5800만 원을 받았다. 반면 중장비가 움직일 때 주변을 통제하는 신호수인 20년 차 직원 B 씨는 지난해 6600만 원을 받았다. 대형 조선사 생산직은 연차별로 임금이 오르는 호봉제를 적용받는다. 현재 업무 강도는 A 씨가 훨씬 높지만 ‘선배’인 B 씨가 더 많은 연봉을 받는 이유다. 이 회사 관계자는 “예전엔 젊은 직원들이 ‘나도 나중엔 저렇게 편해지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요즘은 업황이 어렵고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져 호봉제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연차 높은 직원이 업무와 관계없이 많은 급여를 받는 것은 비단 이 조선소만의 현상이 아니다. 지난해 30년 이상 일한 국내 근로자 평균 임금은 1년 미만 근로자의 2.87배에 달했다. 유럽연합(EU)의 1.65배(2018년)를 크게 웃돈다. 급변하는 산업 환경에도 여전히 연공서열에 묶여 있는 한국의 임금체계 개편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 부작용 커지는 호봉제

7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100인 이상 사업체 중 연차에 따라 임금이 오르는 호봉제를 운영하는 곳은 전체의 55.5%였다. 특히 규모가 큰 1000인 이상 사업체의 호봉제 비율은 70.3%에 달했다. 한국이 유독 근속 30년 이상 근로자와 1년 미만 근로자의 임금 격차가 큰 것은 이런 호봉제 유지의 영향이 적지 않다.

고도성장기에 장기근속을 유도하려고 확산된 호봉제는 급변하는 산업 환경과 저성장·고령화 시대를 맞아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고 있다. 호봉제 비율이 높은 공공부문은 부분적으로만 성과를 반영한 임금체계를 도입하면서 임금이 왜곡되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한 공공기관에 2000년 입사해 2014년 부장으로 승진한 C 씨(48)는 지난해 7246만 원을 받았다. 반면 입사 동기인 D 씨(48)는 2020년 부장으로 승진했는데, 600만 원가량 더 많은 7876만 원을 받았다. 이 기관은 평직원에겐 호봉제를, 부장 이상 관리자에게는 성과를 반영한 연봉제를 적용한다. 7년 늦게 승진한 D 씨가 호봉제를 더 오래 적용받으며 임금이 역전된 것이다. 기관 관계자는 “먼저 승진한 사람이 더 보상받아야 하는데 실상은 그 반대”라고 말했다.

대기업의 정규직 중심으로 운영되는 호봉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를 키우는 요인이기도 하다. 대기업 직원은 한곳에서 20년 넘게 일하며 매년 임금이 오르지만 중소기업 직원은 열악한 근로조건과 잦은 사업체 변경 등으로 장기근속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 MZ세대 “지금 일한 만큼 받아야 공정”

최근 20, 30대 젊은 직원들이 공정한 보상을 요구하고 나선 점도 임금 개편에 힘을 싣고 있다. 이직이 활발한 젊은 세대들은 ‘나중에 더 받기’보다 ‘지금 일한 만큼 받기’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본보가 취업플랫폼 캐치에 의뢰해 지난달 20, 30대 직장인 1200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응답자의 71.9%(863명)가 연차에 따른 호봉제에서 직무급 또는 성과급으로 바꾸는 것에 찬성했다.

8년 차 직장인인 한 응답자(36)는 “어려운 직무를 맡은 직원과 상대적으로 업무 강도가 낮은 직원이 같은 급여를 받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응답자(23·여)도 “하는 일 별로 없는 사람들이 연차가 많다고 고액의 임금을 받는다”며 “시대가 바뀌었으니 호봉제는 폐지돼야 한다”고 했다. 3년 차 공무원인 30대 김모 씨(여)는 “같은 7급인데 호봉이 높다는 이유로 월급을 더 받는 사람들을 보면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든다”며 “열심히 한다고 더 받는 것도 아닌데 열심히 할 유인이 없다”고 했다.

임금체계 개편에 부정적인 응답자들도 대부분 호봉제를 옹호한다기보다는 바뀔 임금체계의 공정성을 신뢰하지 못하기에 반대했다. 임금체계 개편에 반대한 응답자(337명)의 65.9%(222명)는 ‘평가 기준이 공정하다면 찬성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 임금피크제 대체할 근본 해법 시급

전문가들은 2016년 60세 정년 법제화 때가 국내 임금 개편의 최적기였다고 꼽는다. 하지만 당시 정년을 늘리는 대신에 고령 근로자의 임금을 삭감하는 ‘임금피크제’라는 임시방편을 도입하는 데 그쳤다. 최근 제조업 고령화가 더욱 심해지면서 산업계에선 정년 연장과 임금피크제를 둘러싼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한계에 봉착한 임금피크제를 대신할 근본적 대안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고령화 시대 인력 수급과 고령자 고용 안정 등을 위해 과도한 연공(年功) 중심의 임금체계를 바꾸는 건 시급하고 절박한 과제”라고 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9월 ‘2022년 한국 경제 보고서’에서 “한국 정부는 사회적 파트너들과 협력해 (연공서열 중심의) 임금을 직무 요건과 능력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오계택 한국노동연구원 임금직무혁신센터 소장은 “당장 직무급으로 바꾸는 게 현실적으로 어려우니 호봉제의 연공성을 완화하는 식으로 서서히 바꿔야 한다”고 했다. 유규창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는 “공무원, 공공기관부터 임금체계를 선도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일부 MZ “깜깜이 평가받을바엔… 차라리 호봉제가 덜 억울”



“근로자가 수긍할 평가체계 구축이 임금체계 개편의 성공 열쇠”


“팀장하고 친한 순서로 평가받을 거라면 차라리 호봉제가 덜 억울하죠.”

대기업 직원 정모 씨(32)는 지난해 인사 평가 면담에서 “평가 결과가 마음에 드느냐”란 부서장의 질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솔직히 답변했다. 그는 당시 자신의 업무 성과를 설명하면서 반대로 ‘평가 근거’에 대해 물어봤다. 결국 명쾌한 이유는 듣지 못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정 씨 부서에서 평가를 가장 잘 받은 이는 부서장의 개인 경조사까지 챙기는 친한 동료 직원이었다. 정 씨는 “차라리 나보다 일을 더 잘해서 그에게 좋은 평가를 줬다는 말을 들었다면 납득했을 것”이라며 “그 직원도 일을 못한 건 아니지만 찜찜했다. 두 사람이 업무를 비슷하게 한다면 평가자가 더 친한 사람에게 높은 평가를 주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흔히 ‘능력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MZ세대 중에서도 호봉제에 찬성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들의 이유를 들어보면 호봉제 자체를 지지해서만은 아니다. 합리적인 보상을 원하지만 기존 경험에 비춰 볼 때 평가가 불합리할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청년들은 직장 내 평가의 문제점으로 평가자와의 사적 친분이 영향을 끼치거나 직무와 성과를 객관적으로 측정 평가하기 어려운 점을 꼽았다. 공무원 이모 씨(32)는 재작년에 누구나 부서 내 주요 업무를 도맡았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인사고과에서는 중상 등급인 ‘A’를 받았다. 반면 근무시간에 종종 몰래 외출이나 게임을 하던 직원이 최상 등급인 ‘S’를 받는 것을 봤다. 이 씨는 “부서장이 ‘고생한 건 알지만 돌아가면서 고과를 줘야 한다’고 했다”며 “이런 깜깜이 평가가 임금으로 연계되면 억울할 텐데, 그래도 호봉제가 유지되면 언젠가 내가 많이 받는 순서가 오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당장 직무·성과급제를 전면 도입하기보다는 기업과 직무 특성 등에 따라 다양한 혼합형 임금체계를 도입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정보기술(IT) 업계 종사자 A 씨는 “IT 업종은 직무 난이도가 높지만 객관적 성취도를 파악하기 어렵다. 호봉제를 토대로 직무급을 보완하는 방식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근로자가 수긍하는 직무·성과 평가체계 구축이 MZ세대는 물론이고 전체 임금체계 개편의 성공 열쇠라고 말한다. 최영기 전 한국노동연구원장은 “회사가 독단적, 자의적으로 직무·성과평가 시스템을 만든다면 근로자들의 거부감이 심할 수밖에 없다”며 “평가체계 설계에 근로자가 참여하고 미국의 ‘오넷’처럼 정부가 직무별 시장임금 정보 인프라를 구축해 객관적 기준을 제시하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주애진 기자 jaj@donga.com
김예윤 기자 yea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