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애경 고려대 영어교육과 교수
‘놀러가서 죽은 애들.’
이태원 참사에 희생된 156명의 젊은이들을 가리켜 온라인에 올라온 댓글이다. 예상되는 사고 관리에 손을 놓아버린 기관들 대신 참변을 당한 희생자들을 죄인으로 만들어버리는 참으로 해괴한 주장이다.
우선 ‘놀다’와 ‘죽다’ 사이엔 어떤 인과성도 없을뿐더러 살날이 구만리 같은 애들이 갑작스레 죽게 된 상황도 순리에 안 맞다. 생로병사의 여정 중 첫 단계 ‘생’을 지나던 이들이 늙고 병드는 두 단계를 건너뛰고 마지막 ‘사’에 이른 건 자연의 순리를 벗어난 것이다. 문제의 댓글에서 유일하게 자연스러운 조합이 있다면 ‘놀러간 애들’이다.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으면 못 노나니’라는 노래 가사처럼 젊은 ‘애들’이 껑충거리며 놀러 다니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반면 젊은 나이에, 그것도 놀러가서 죽는다는 상황은 자연의 순리나 인과관계에는 없는 인재다. 희생된 청년들에 대한 애도를 거부하는 ‘놀러가서 죽은 애들’이란 표현은 이렇듯 사실상 이번 참사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수년간 지속된 팬데믹을 거치면서 청년들이 자신의 자연적 속성과 반대되는 신중한 생활을 해야 했다. ‘이불 밖은 위험하다’고 자조하며 비대면 환경이 제공할 수 있는 딱 그만큼의 경험치를 쌓는 데 만족해야 했다.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통해 세상을 보고 배달음식과 집밥, 혼밥으로 끼니를 해결하며 모니터 너머로 선생님을, 동기를, 동료를 만났다. 이불 속에서 몸을 사려 왔던 이들에게 모처럼 제한이 풀린 핼러윈은 ‘신중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청년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반가운 기회였다.
조커, 팅커벨, 오징어게임의 저격수로 분장한 이불 속 나와는 다른 기상천외한 나를, 혹은 타인들을 대면하고 싶었던 10만 명의 청춘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한때 젊어봤던 누가 이들을 탓하는가. 망아지처럼 경계 없이 껑충거리는 젊음은 공감의 대상이지 손가락질의 대상이 아니다. 이 망아지 같은 젊음의 각을 잡아주는 건 양몰이하듯 훠이훠이 저리로 돌아가라 성가시게 잔소리하는 참견쟁이 늙은 어른의 몫인데, 그날 그 터져나갈 것 같던 이태원 골목엔 호루라기라도 불어주는 이런 참견쟁이 어른이 없었다. 젊음은 죄가 없다.
노애경 고려대 영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