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강섭 신경정신의학회 이사장 ‘이태원 참사’ 트라우마 극복하려면…
오강섭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장은 4일 인터뷰에서 “이태원 참사 생존자와 유가족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려면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고 손을 잡아줘야 한다. 이는 살아남은 우리의 의무”라고 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지난달 29일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주말 이태원을 찾았던 수많은 청년들이 목숨을 잃었다.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함께 울고 웃던 친구를 잃은 사람들은 짐작조차 어려운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 구조에 참여했던 소방관 경찰관 의료진은 “생전 겪어보지 못한 참혹한 현장”이었다고 토로한다. 참사 이튿날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영상 유포와 혐오 발언을 자제할 것을 요청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트라우마를 예방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며 여론이 성숙하게 흘러가는 계기가 됐다. 4일 만난 오강섭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장은 “이태원 참사의 트라우마가 여느 참사보다 심각할 수 있다”고 했다. 도심 한복판서 발생한 이태원 참사는 직접 목격한 사람이 많고 영상을 찍은 사람도 많다. 그는 “제2, 제3의 피해가 발생해 트라우마 환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우리 사회에서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 대구 지하철 화재, 세월호 참사 등 대형 재난이 반복되고 있다. 이에 따른 국민의 집단 트라우마도 상당한 것 같다.
“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의 뿌리는 세상이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이다. 가족을 불의의 사고로 잃으면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 ‘간신히 살아 돌아왔지만 세상은 위험하다’ 같은 인지 왜곡이 발생한다. 어떤 측면에선 재난으로 인한 신체적 외상보다 심리적 외상이 더 크고 깊다. 이태원 참사 조문을 왔다가 쓰러진 세월호 유가족이 그런 경우다. 우리 사회가 재난 이후 PTSD에 관심을 갖게 된 건 2014년 세월호 참사 때다. 2018년 국가트라우마센터가 생겨 재난 상황에 대응하고 있지만 아직 걸음마 단계이다. 집단 트라우마는 우리 공동체를 병들게 한다.”
―이번 참사는 유독 “귀신 놀이 하러 갔다” “가족이 왜 안 말렸나” 등 피해자를 비난하는 혐오 발언이 많았다.
―재난이 발생했을 때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을 어떻게 도와야 하나.
“첫째, 소통이 중요하다. 잘 들어주기만 해도 공포심이 줄어든다. 둘째, 가짜 정보를 주의해야 한다. 불안하면 음모론에 현혹되기 쉽고, 음모론은 공포 반응을 더욱 자극한다. 사고 원인이 번복되면 피해자를 혼란에 빠뜨린다. 셋째, 사회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지진 같은 재난을 겪은 사람들 중에 빨리 회복되는 사람은 누구일까. 먹고 자고 일상을 유지한 사람이 PTSD를 극복한다. 물리적인 지원, 심리적인 지원이 모두 중요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우리 사회가 살 만한 곳이라는 걸 느끼게 해줘야 한다. 그래야 구성원의 심리적 외상이 치유되고 사회 전체가 건강해진다.”
―그렇다면 정치적인 양극화나 사회 갈등도 트라우마에 영향을 미친다는 건가.
“야구를 좋아하면 야구 뉴스만 듣는 것처럼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에 집중한다. ‘주의 편향’ ‘해석 편향’이라고 한다. 이런 편향성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지만 정치인이 이를 부추겨서는 안 된다. 피해자는 사회적으로 지지받고 공감받는다고 느낄 때 심리적 안정을 찾아간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고통받는 국민을 국가가 돕겠다’고 말해줘야 한다. 그런데 갈등이 많은 사회는 이런 기능을 할 수 없다. 이런 재난을 어떻게 봉합하느냐가 그 사회의 성숙도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참사 당일 주저 없이 구조에 나선 사람이 있고, 술을 더 마시러 가자는 사람도 있었다. 누구는 뛰어들어 돕고, 누구는 외면하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건가.
―트라우마를 개인이 극복해야 할 문제로 보는 시각도 여전하다. 정부가 심리적 지원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는 뭔가.
“구성원 한 명, 한 명이 건강할 때 우리 사회 전체가 건강해진다. 불과 70년 전 전쟁을 겪었다. 그 PTSD를 극복하는 데 한 세대, 두 세대가 걸렸다. 몸도 건강한 사람, 약한 사람이 있듯이 정신도 건강한 사람, 약한 사람이 있다. 취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게 국가의 역할 아닌가. 국가가 무한한 책임감을 갖고 유가족과 친구, 부상자, 목격자 등에 맞는 적절한 심리적 지원을 반드시 해줘야 한다. 미국은 9·11테러 20년이 지난 지금도 PTSD 환자를 지원하고 있다. 특히 세월호 참사와 코로나19, 이태원 참사를 차례로 겪은 20대에게 집단 트라우마가 남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정부나 사회적 차원에서는 어떤 지원이 도움이 되나.
“먼저 정부나 사회가 생존자와 유가족을 돕겠다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다. 정신의학적으로 보면 국가애도기간은 시의 적절하게 선포됐다. 국민이 비탄에 빠졌다는 걸 정부가 인정해준 거다. 물리적·심리적인 정부 지원의 ‘신속성’도 중요하다. 재난 상황에선 식사와 수면 같은 일상을 잘 유지해야 회복이 빠르다. 일상 회복을 돕는 실질적인 지원과 함께 PTSD에 대한 심리적 개입이 빨리 이뤄져야 한다. PTSD는 성격장애, 불안장애, 우울장애, 알코올 남용 등 다양한 증상이 나타날 수 있어 급성기 치료가 중요하다. 자원봉사가 확산되는 것도 의미 있다. 우리 사회가 생존자와 유가족을 지원하는 건 ‘세상은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살 만하다’는 안정감을 주는 것과 같다. 구호품을 보내고, 자원봉사를 함으로써 연대감을 보여줄 수 있다. 의인과 미담 사례를 많이 보도해야 한다. 그런 뉴스를 보면 세상은 안전한 곳이라고 느끼게 되고 마음이 덜 괴롭다.”
―옆에 생존자나 유가족이 있다면 어떤 말을 건네야 하나. 위로하고 싶어도 방법을 몰라 상처를 덧나게 할 때가 있다.
“억지로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너무 무서웠다’ ‘너무 힘들다’ 이렇게 얘기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충격이 커서 쉽사리 말을 못 할 수도 있다. 그럴 땐 그냥 기다려야 한다. 만약 내 친구라면 ‘언제든지 전화해라’ ‘밥은 먹냐. 만나서 밥 먹자’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는 결국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 하지만 주변의 지지가 없으면 마지막 단계까지 갈 수 없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성급히 충고하는 건 상황을 악화시킨다. 그리고 위기상담 핫라인(1577-0119)을 꼭 안내드리고 싶다. 본인의 심적 고통을 설명하면 그에 맞는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오강섭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장1992년부터 강북삼성병원(성균관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로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1996∼1997년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연수를 받는 동안 본격적으로 불안장애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대한불안의학회 회장과 이사장, 대한노인정신의학회 이사장, 한국자살예방협회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우리 가족 마인드 클리닉’ ‘불안한 마음 괜찮은 걸까’ 등이 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