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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안에서[공간의 재발견/정성갑]

입력 | 2022-11-11 03:00:00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


‘띠띠띠….’

동서울시외버스터미널. 경기 양평으로 떠나는 버스가 후진하며 내는 소리가 그리 사람을 편안하게 할지 몰랐다. 서울에서 멀어진다는 것, 조금씩 벗어난다는 것이 왜 이리 위안으로 다가오는지. 지난 한 달, 강원 철원과 양평으로 버스를 타고 떠날 일이 있었다. 첫 여정에서는 막연히 좋다, 하는 마음이었는데 두 번째 여정에서는 버스로 하는 이동만이 줄 수 있는 만족과 기쁨이 실감나게 와 닿으면서 그 내용을 나에게 보내느라 수없이 여러 번 카카오톡 창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안정적인 속도로 미끄러지는 버스 안에 있다 보면 시공간의 무늬가 계속해서, 미묘하게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크고 복잡한 도시를 빠져나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20여 분. 버스가 달릴수록 풍경은 한적해져 건물의 밀도가 슬슬 낮아지고 그 사이로 나무와 들판, 임야와 공터가 펼쳐진다. 그 여백만큼 머리도 숨을 쉬면서 이런저런 상념에 젖는다. 어제 화를 낸 것에 대한 후회부터 10년 후 나의 인생, 사람의 도리와 행복의 조건에 이르기까지. 버스만 주기적으로 타도 괜찮은 어른이 될 것 같다. 버스는 달리고 시간은 흐르고. 밝은 땅, 어두운 땅, 쨍한 구름과 어둑한 달, 사람 없는 강과 산. 만 원 돈으로 비행기 비즈니스석에 앉은 것처럼 편안하고 듬직한 기분을 느끼며 시공간의 변화를 이리 오롯이 감상할 수 있는 여행은 버스뿐 아닌가 싶다.

그렇게 서울발 버스를 타고 찾아가는 곳에는 색다른 시간과 풍경이 있다. 철원에서는 비무장지대를 들어갔는데 서울에서 2시간 떨어진 거리에 이런 세상이 펼쳐지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신분을 확인하고 내비게이션도 잘 안 터지는 척박한 땅으로 들어가는 길.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만 하늘이 바다처럼 넓게 보이는 줄 알았는데 철원의 그곳에서도 하늘은 시야를 와락 덮을 만큼 장대하게 펼쳐졌다. 건물이 거의 없고 있어 봐야 비닐하우스 수준으로 드문드문 낮게 지어지다 보니 하늘과 들판, 아까시나무와 새까지 모든 존재가 크게 보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발해를 꿈꾸며’의 뮤직비디오를 찍은 옛 노동당사는 북한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이국적이었다. 민통선 내 샘통 지역에서 나는 맑은 물로 물고추냉이(와사비)를 재배하는 농장에도 들렀는데 이곳에서는 상시 거주를 할 수 없어 아침에 출근했다 저녁에 빠져나오는 생활을 한다고 했다.

양평은 또 어땠나. 서울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지만 그곳에는 서울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하천과 뒷산과 논밭이 있었다. 쓸쓸하기도, 풍성하기도 한 땅. 다른 세상에는 다른 힘이 있었다. 다시 버스로 돌아오는 길. 오랜만에 깊고 큰 숨을 쉰 것 같았다.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