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3중고 겹쳐 경제난 심각 우크라 전쟁으로 곡물가격지수↑… 식량값 폭등이 인플레로 이어져 킹달러에 외환보유액 사수 비상… 해외부채 많은 국가들 위기 처해 “마트 돌며 일주일 식량 겨우 구해”… 쇼핑몰 옷 판매대 드문드문 비어
중동 국가들의 경제난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에 우크라이나 전쟁, ‘킹달러’로 불리는 달러화 초강세 현상까지 ‘3중고’가 겹친 결과다. 이집트와 레바논, 시리아, 튀니지 등 경제적 기반이 약한 국가들에선 경기 침체, 물가 폭등, 고환율에 따른 수입 대란 등 경제 위기가 국내 정세 불안을 고조시키면서 복합 위기로 번지고 있다.
이 국가들은 국제통화기금(IMF) 또는 인근의 걸프 산유국에 손을 벌리거나 외화 유출을 막으려 은행 현금 인출까지 금지하는 등 고육지책을 펴고 있지만 역부족인 실정이다. 일각에선 식량 가격 폭등과 생필품 부족으로 서민들의 불만이 가중되면서 ‘제2의 아랍의 봄’이 촉발될 수 있다는 조심스러운 전망도 나온다.
○ “마트 5곳 돌아 일주일 식량 겨우 구해”
세계 최대 밀 수입국이자 전체 밀 수입량의 75%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 의존해 온 이집트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식량난에 빠졌다. 5월 이집트 수도 카이로의 빵집 앞에서 여성들이 빵을 사기 위해 줄지어 서 있다. 이집트 정부는 소득이 일정 수준 이하인 국민들에게 주식인 빵 구매비를 지원하고 있다. 카이로=AP 뉴시스
레바논도 상황이 비슷하다. 수도 베이루트에서 빵집을 운영하는 엘리아스 파레스 씨는 1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대부분의 레바논 사람들은 요즘 빵만 먹으면서 산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막막하다”고 했다. 최근 러시아가 흑해를 통한 곡물 수출 합의를 파기하겠다며 압박 수위를 높이는 가운데 올 3월 우크라이나 전쟁 직후 곡물 수출이 완전 중지됐을 때 벌어졌던 혼란이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 때문에 밀가루 사재기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자동차는 중고차 값이 신차 가격을 뛰어넘는 기현상이 벌어진 지 오래다. 이집트 정부가 달러 등 외환보유액을 지키기 위해 수입 장벽을 높이면서 최근 신차 수입이 크게 줄었다. 그 결과 중고차로 수요가 몰려 중고차 값이 같은 차종 신차 출고가보다 비싼 경우가 많다. 일부 수입 자동차 판매 법인들은 “고객이 신차 가격을 지급한 후 1년 안에 차를 인수받지 못할 경우 구매 금액에 14%를 추가로 얹어 환불해 주겠다”는 마케팅까지 하고 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2019년부터 은행의 외화 현금 인출을 제한하는 레바논에서는 “내 달러 예금을 인출할 수 있게 해달라”며 은행에서 강도 행각을 벌인 여성이 영웅 취급을 받는 일까지 벌어졌다. 살리 하피즈라는 레바논 여성은 9월 14일 장난감 총을 들고 베이루트의 한 은행에 들어가 “내 돈을 내놓으라”고 위협했다. 하피즈는 현지 언론에 “암 치료를 받고 있는 언니를 살리기 위해 계좌에 있는 달러가 필요했다”고 했다.
○ 세계 경제 위기, 내수 취약 중동에 직격탄
식량 위기는 이 같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인 5월 국제 곡물가격지수는 173.5까지 치솟아 역대 최고치를 찍었다. 이집트는 세계 최대 밀 수입국으로 전체 밀 수입량 중 75%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조달했다. 알제리, 모로코 등도 아프리카 및 중동에서 밀수입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이다.
튀르키예(터키)와 유엔의 중재로 흑해를 통한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산 식량 수출이 일부 재개되면서 8월 곡물가격지수가 145.6으로 떨어지는 등 일시적으로 안정세를 보였다. 하지만 지난달까지 152.3으로 오르는 등 두 달 연속 상승세를 보이며 여전히 불안한 모습이다. 지난주 미국 시카고선물거래소 밀 가격은 1부셸(약 27kg)당 8.73달러로 2019년부터 2021년까지 평균치보다 50% 비싸다.
식량 값 상승은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레바논의 9월 물가상승률은 162.47%로 26개월 연속 세 자릿수 상승률을 기록했다. 이집트 역시 올 3∼8월 평균 월별 물가 상승률은 13.7%에 달했다. 올해 물가상승률은 9월 기준 15%로 4년 만에 최고치다. 세계은행은 “세계 경제 불안정성이 큰 상황에서 내수 시장 공급 능력이 이를 뒷받침하지 못한 탓”이라고 분석했다. 유엔세계식량프로그램의 수석 경제학자인 아리프 후사인은 FT에 “연료와 식량, 비료 등을 수입에 의존하면서 동시에 해외 부채가 많은 국가들은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 외환보유액 부족 위기까지 겹쳐
미국의 초강력 재정 긴축이 야기한 ‘킹달러’ 현상으로 외환보유액 사수에도 비상이 걸렸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월 545억 달러였던 이집트 외환보유액은 8월 말 기준 374억 달러로 급감했다. 포린폴리시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전쟁 직후인 2월과 3월에만 해외 투자 자본 200억 달러가 이집트에서 빠져나갔다. 여기에 최근 달러 가치가 오르면서 외화 유출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IMF 부채액이 아르헨티나 다음으로 많은 이집트는 수년간 상환해야 할 외채가 1580억 달러(약 227조 원)가 넘는다. 여기에 해외 곡물 구매와 이집트 파운드화 가격 방어 등을 위해선 달러화가 절실한 상황이다.이에 이집트 정부는 달러 유출을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3월 수입업자들의 달러 사용과 해외에서 달러 인출을 제한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하지만 안 그래도 품귀 현상을 빚고 있는 식량과 생필품 등 각종 수입품 공급이 더욱 어려워지면서 물가가 더욱 치솟고 있다. FAO 보고서에 따르면 이집트 인구의 70% 이상이 건강한 식단에 접근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인 것으로 파악됐다.
튀니지와 알제리 같은 인근 국가들 역시 달러화 부족으로 설탕, 식용유, 우유 등 식품 수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외화 예금 지급 정지 조치가 수년째 시행 중인 레바논에서도 국민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 레바논에서는 해외에 취업한 가족이 송금해 주는 달러에 의존해 생계를 꾸리는 가정이 많은데 은행 거래가 막혀 돈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유엔은 “레바논 정부의 이 같은 조치는 인권침해 수준”이라고 비판했다.
레바논 정부 역시 IMF의 요구에 따라 1달러당 1507레바논파운드로 약 25년째 고정돼 있던 환율을 이달 1일부터 1만5000레바논파운드로 대폭 조정했다. 이마저도 암시장 가격(1달러당 3만8500레바논파운드)에 한참 못 미쳐 추가 재조정이 불가피하다.
이 같은 난국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미국은 금리 인상 방침을 당분간 유지할 것으로 보여 ‘킹달러’ 현상이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집트의 민간 부문 침체와 빈곤층 증가 등으로 이집트 경제가 이미 경기 후퇴에 들어섰다고 보고 있다.
○ 국민들 거리로… ‘제2의 아랍의 봄’ 전망도
경제 위기의 장기화는 중동 지역 정세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제27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7)가 열리고 있는 이집트에서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이집트에 입국하는 11일(현지 시간) 전국적인 정부 규탄 시위가 열릴 것으로 보인다. 주이집트 한국대사관은 “COP27 기간에 이집트 주요 지역에서 인권침해, 경제 상황 악화 등을 규탄하는 대규모 대정부 집회가 예고돼 있다. 11일에는 외출 자제 등 신변 안전에 유의해 달라”고 공지했다.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도 올 7월부터 물가 상승에 불만을 품은 시민들의 정부 규탄 시위가 꾸준히 벌어지고 있다. 레바논에서는 예금 인출을 요구하는 시민들이 은행에서 인질극을 벌이는 사례가 늘고 있고, 교사 등 여러 직군이 동시다발적으로 파업에 들어간 상태다. 튀니지 역시 지난달 말 수도 튀니스에서 시민 수천 명이 카이스 사이에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5월 보고서에서 “IMF의 방침에 따라 식품 및 에너지 보조금 규모를 축소하는 등 긴축 재정 정책이 강화될 경우 이집트, 튀니지를 비롯한 북아프리카 및 중동 국가들의 정세가 악화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튀니지 일반노동조합 조합원들이 6월 튀니지 수도 튀니스에서 “경제 위기에 책임을 지라”며 정권 퇴진 시위를 벌였다. 튀니지에서는 식량 위기와 식료품 등 생필품 부족으로 시민 불만이 고조되면서 반정부 집회와 대규모 파업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튀니스=AP 뉴시스
대외정책연구원은 “(일부 중동 국가의 경우) 경제가 2011년보다 견고하고 해외 지원도 있어 심각한 정세 불안이 발생할 가능성은 현재로선 2008년 식량위기 때보다 낮은 편”이라면서도 “에너지 가격이 지속적으로 상승할 경우 전반적인 인플레이션을 불러오고, 그에 따라 식품 가격까지 덩달아 올라 정세 불안이 심화될 우려가 있다”고 전망했다.
카이로=강성휘 특파원 yol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