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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나 [고양이 눈썹 No.44]

입력 | 2022-11-12 16:00:00




▽“적들은 더욱 다가왔다. 일자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기다렸다. 적선들에서 함성이 일었다. 적의 제1열과 제2열이 합쳐지면서, 양쪽으로 날개를 벌리기 시작했다. 적은 선두가 전투 대형으로 바뀌었다. 물은 적의 편이었다. 적은 휩쓸듯이 달려들었다. 감당할 수 없는 적의 힘이 내 몸에 느껴졌다. 나는 뼈마디가 으스러지듯이 아팠다.

2021년 11월

물러서야 한다고 내 속에서 내가 아닌 내가 나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김훈 작가의 소설 ‘칼의 노래’(2001년)에는 ‘내 속에서 내가 아닌 내가’라는 표현이 두 번 등장합니다. 위 대목은 명량해전이 시작되기 직전, 이순신 장군이 선두에 선 대장선에 올라 물밀 듯이 밀려오는 적선을 맞는 두려움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 소설은 왜군, 조정, 명군 등 물리적인 적과 정적으로 사방이 둘러싸인 채 전쟁을 치러야 했던 장군의 내적 갈등과 두려움을 유려한 상상력으로 묘사하며 이야기를 끌고 나가죠. 자아와 비자아의 끊임없는 투쟁. 이 소설의 몰입감이 높은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내안의 나”라는 표현은 내가 나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고, 내 인격이 이중적으로 느껴질 때 쓰이는 말입니다. 내 자신이 누구인지 불확실할 때 괴롭죠. 주식이나 미래나 불확실성이 가장 큰 두려움인가 봅니다.


2018년 11월



▽자아(自我)는 참 뛰어난 번역 같습니다. ‘ego’를 번역한 것인데요, ‘스스로 있는 나’, ‘스스로 생각하는 나’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여호와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I am who I am)’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스스로 있는 자. 즉 ‘스스로 말미암은 자’이니 ‘자유(自由)로운 자’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freedom’이나 ‘liberty’에 해당하는 단어는 일본이 난학(蘭學) 번역하는 과정에서 ‘자유(自由)’가 됐죠. 노자 장자의 도가 사상에서 쓰이던 ‘자유’라는 단어를 붙이면서, 뜻이 조금 왜곡됐지만 그럴듯한 번역이 됐습니다. 도가사상에서 ‘자유’는 ‘내 마음대로’란 뜻이 강하니까요. 어쨌든 나를 알아가려는 과정이 결국 자유를 위함이라는 것은 적당히 공감됩니다.

내가 나라는 건 잘 알겠는데, 대체 ‘나’는 누구일까요? 도돌이표 같은 질문이라 대답은 영원히 모를 것 같습니다. 자아는 자의식(Self-consciousness) 문제로 연결됩니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전해도 자의식까지는 못 만들겠죠. 복제인간이 나온다 해도 자의식까지 복제하기는 어려울테니까요.

▽‘오이디푸스의 신화’ 마지막에서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을 뽑아버립니다. 자신의 운명에서 스스로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이해하는 순간 저지른 행동이죠. 비극적 한계를 상징하는 서사인데요, 세상을 잘 바라봤지만 정작 자신을 보는 눈이 없던 것에 대한 통탄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몰랐다는 내적 갈등의 상징입니다. 오이디푸스는 이렇게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제한해 버립니다. 이 서사를 박찬욱 감독도 영화 ‘올드보이’(2003년)에서 복제하죠. 자신을 둘러싼 진실을 알게 된 주인공이 자신의 혀를 도려내는 것으로요.

2019년 1월



▽신대륙의 발견 못지않게 위대한 근대의 발견이라는 ‘자아’는 아직도 다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아직도 숱한 이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고, 제주 올레길을 걷습니다. 청년들은 MBTI 검사를 하며 자신이 어떤 기질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탐구합니다. 중장년들은 ‘대체 뭣 때문에 이렇게 살았는지 모르겠다’며 절에 들어가 수행을 하고 새벽 기도를 하기 위해 교회를 찾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인류가 생물학적으로 스스로를 복제하며 명맥을 유지하는 한, 절대 풀리지 않을 비밀인지도 모릅니다. 대체 나는 누구일까요. 여러분은 여러분이 누구인지 찾으셨나요.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