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간 거리 존중 않는 무례한 사회 굶주림, 수단 삼으려 모금 막은 레닌 추모=수단, 목적=퇴진 “퇴진이 추모다”
박제균 논설주간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거리가 있다. 아니, 있어야 한다. 파리 특파원 시절, 두 사람이 겨우 지나칠 수 있는 좁은 골목이나 복도에서 누군가와 마주쳤을 때. 한국 같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그들은 달랐다. 옆으로 비켜서서 먼저 지나가라고 했다.
그런 배려가 처음에는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졌다. 어깨 스치는 것쯤은 다반사인 밀집사회에서 살았던 터에. 그 배려가 고대부터 전란이 잦았던 서구 사회에서 자기 보호를 위한 거리 두기에서 유래했다는 해석도 있다. 어쨌거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훨씬 편안하다는 걸 몸으로 알게 됐고, 나 또한 그들을 위해 길을 비켜줬다. 물론 이런 서구식 매너는 밀집과 속도의 한국으로 돌아온 뒤 금방 잊었지만.
아직 꽃피우지도 못한 젊은이들의 이른 희생과 아닌 밤중에 참척의 슬픔을 당한 분들께 드릴 말씀이 없다. 참사 수습과 위로, 규명과 문책의 시간을 갖되 어쩌면 그런 참사를 막을 수도 있었을 그 무엇에 대해 생각한다. 그 무엇이 바로 사회의 기본이다. 무엇보다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때려 넣어도 괜찮은 우리 사회의 문화. 이젠 바꿀 때 됐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존중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기 때문이다.
시위 한답시고 직장도 아니고 집 앞까지 몰려가 이웃 주민까지 괴롭히고, 공인(公人)도 아닌 사인(私人)의 SNS를 터는 것도 모자라 가족까지 털어 인격살인을 자행하며, 떼로 달려들어 댓글 폭탄을 퍼붓는 작태는 사람이 사람에게 지켜야 할 거리를 넘어서는 짓이다.
무엇보다 사회적 참사와 개인의 불행을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삼는 건 인간에 대한 예의의 문제다. 공동으로 장례를 치르든, 추모공간을 만들든 유족들이 자발적으로 하겠다면 도와줘야 할 것이다. 그런데 더불어민주당과 이재명 대표가 먼저 나서 참사 희생자의 얼굴과 이름 공개를 요구하고 있다. 지나치지 않나.
주말마다 “퇴진이 추모다”를 외치는 사람들. “대장동 몸통은 윤석열”이라는 말만큼이나 밑도 끝도 없는 이 구호에는 무엇이 목적이고, 무엇이 수단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추모는 수단이고, 퇴진이 목적이다. 정작 추모는 없고, 퇴진만 있는 냉혹한 프로파간다가 아닐 수 없다.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블라디미르 레닌. 그는 22세 때 기근으로 죽어가는 농민을 도우려고 모금을 하는 친구를 설득해 그만두게 했다. ‘굶주림이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해 농민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인 현실에 대해 숙고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런 레닌의 악령이 아직도 한반도의 하늘을 배회하고 있다.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무슨 수단을 쓰든 합리화하는 세력들. 그 수단이 설혹 남의 불행이나 국가적 참사라 할지라도. 더 비관적인 건 목적이 수단을 합리화하는 데 이골이 난 문재인 정권에 점염(點染)된 많은 국민이 이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풍토다.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 보자. 2003년 유럽에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대폭염이 닥쳤다. 프랑스에서만 1만여 명의 노인이 죽었다. 피해자는 거의 다 도시가 텅 비는 바캉스 시즌에 홀로 남겨진 노인들이었다. 한국 같으면 정권이 무너질 수도 있었겠으나, 프랑스 정부는 1년이 지나서야 종합 대책을 발표했다.
거기에는 △사고 원인 규명 △문책의 범위와 처리 결과 △1년간 대폭 늘린 요양시설 개수 등 노인보호 시스템 개선 결과 △향후 대책 등이 망라돼 있었다. 참사가 일어나도 말만 앞세우며 호들갑 떨지 않고, 더욱이 참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으며, 시간이 지나도 가신 분과 남은 분을 기억하고 위로하며, 다시는 이 땅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추모의 길이 아닐까.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