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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인사이트]‘쓰러진채 600년’ 경주 남산 마애불, 일으켜 세운다

입력 | 2022-11-14 03:00:00

열암곡 마애불 입불 논의



이소연 문화부 기자


《‘5cm의 기적’ 부처님은 이제 중생에게 친견(親見)을 허락할까.

15년 전 경북 경주에서 엎어진 채 발견됐지만 얼굴에 풍화로 닳은 흔적 하나 없어 화제가 됐던 ‘남산 열암곡 마애불입상’을 세우는 데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열암곡 마애불입상은 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마애불(磨崖佛·자연 암벽에 조각한 불상) 가운데 가장 완벽한 얼굴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학계에서는 마애불이 1430년 발생한 지진으로 인해 쓰러졌다고 분석했다.

600년 동안 쓰러져 있던 불상을 세우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문화재청도 그간 여러 각도로 검토했지만 “자칫 무리해서 세우려다 불상이 훼손될 수 있다”며 쉽사리 사업을 추진하지 못했다. 올해 9월 진우 스님(61)이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에 오른 뒤 분위기가 급변하고 있다. 스님이 ‘열암곡 마애불입상 입불(入佛)’을 최우선 과제로 밝혔기 때문이다. 학계에서도 “이 상태로 불상을 유지하는 것도 안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마애불 세우기에 찬성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다.》


○ 잘못 손댔다간 훼손 위험


2007년 5월 22일 열암곡 마애불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로또 1등 당첨에 가까운 우연이었다. 당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경북도 유형문화재인 열암곡 석불좌상 주변을 발굴하다가 남동쪽으로 약 30m 떨어진 지점에서 거대한 돌덩이를 발견했다. 현장을 조사하던 박소희 연구원은 너비 400cm에 높이 680cm, 두께 280cm인 돌덩이가 심상찮음을 느끼고 나뭇가지 등으로 뒤덮인 바위틈 아래로 손을 넣어 더듬었다. 뭔가 매끈하게 다듬어진 흔적을 찾고 아래를 들여다보니 오뚝하게 솟은 부처의 콧날이 보였다고 한다.

엎어진 불상의 얼굴과 바닥 사이는 불과 5cm. 암벽에서 떨어져 추락했는데도 기적처럼 상호(相好·부처의 용모와 형상)가 하나도 훼손되지 않았다. 게다가 자연스레 파묻혀 있은 덕분에 닳거나 생채기도 나지 않았다. 연구를 통해 9세기 작품으로 확인된 걸 감안하면 1200년 가까이 제 모습을 지킨 셈이다. 그 때문에 발굴 직후에도 “제대로 세우기만 하면 최소 국보나 보물이 될 문화재”라는 평이 나왔다.

하지만 80t이 넘는 마애불 세우기는 절대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문화재계는 물론이고 건축계도 난색을 표했다. 마애불이 있는 장소는 35∼45도에 이르는 급경사로 둘러싸여 있다. 불상을 들어올릴 중장비가 들어오기 어려울뿐더러 불상 자체가 화강암 재질이라 충격을 살짝 받기만 해도 부서질 수 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도 있다. 비지정 문화재인 열암곡 마애불입상이 있는 ‘경주 남산’은 국가사적지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국가사적지에서 비지정 문화재의 위치를 바꿀 때는 반드시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경주시 문화재과 관계자는 “탐방로에 덱 하나를 설치할 때도 문화재청의 허가가 필요하다”며 “마애불 다시 세우기도 중요하지만 남산 보존도 그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라 조심스럽다”고 했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은 2013년 열암곡 마애불과 관련해 50차례 전문가 자문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남산의 지형 변화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대전제에만 동의했을 뿐 결국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했다.


○ “조립식 크레인 활용 가능”

2015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발표한 ‘마애불상 정비 보고서’는 새로운 논란에 불을 지폈다. 연구소는 “불상을 받치고 있는 아래 암석이 충격에 의한 파손과 풍화로 내구성이 저하된 상태”라며 “지진 등 외부 요인으로 외력이 작용하면 불상의 이마 부분이 훼손될 우려가 크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듬해 9월 경주에선 규모 5.8의 지진이 발생했다. 우려가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이후 학계와 불교계에선 “현 상태로 마애불을 방치하는 건 위험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2016년 경주시가 한국건설기술연구원에 의뢰해 ‘입불 방안 연구’를 실시한 결과 “중장비로 마애불을 다시 세우는 것이 이제는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오며 전환점을 맞았다. 연구원이 제안한 방법은 ‘호이스트 크레인’을 활용하는 것이다. 가로세로 각각 20m 크기인 호이스트 크레인은 협소한 공간에도 설치할 수 있고, 크레인을 분해해서 이동한 뒤 재조립할 수 있다고 한다. 헬기로 장비를 마애불 근처로 옮긴 뒤 불상 주변 평지에서 조립하면 남산 훼손 위험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고 밝혔다.

2016년 9월 경북 경주에서 규모 5.8의 강진이 발생한 후 ‘열암곡 마애불입상’이 훼손되지 않도록 임시 천막을 쳤다(위 사진). 마애불 아래 지반을 강화하는 석축을 세우고 낙석을 막아주는 철망을 두른 현재 모습.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경주시 제공

일단 경주시는 2020년부터 2년간 열암곡 마애불이 있는 지반을 단단하게 다지기 위해 2단 옹벽을 쌓아올리는 보강 공사를 했다. 홍원표 경주시 문화재과 주무관은 “산사태나 장마 등으로 바위가 붕괴되지 않게 철망을 마애불 주변에 설치했다”며 “지진 등으로 생기는 낙석으로 인한 훼손 위험성은 줄인 상태”라고 했다.

○ “최소 보물급 문화재, 본모습 찾아야”

기술적으로 긍정적인 의견이 나오면서 마애불 세우기 사업은 탄력을 받고 있다. 진우 총무원장은 “600년 동안 누워 있던 부처님을 바로 세우는 일은 종교적인 차원을 떠나 민족의 얼을 되살리는 일”이라며 국민적 관심을 촉구했다.

문화재청도 올해 8월 열암곡 마애불입상의 관리 주체인 경주시에 연구 용역비 5억 원을 지원했다. 현재 경주시는 앞선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한국건설기술연구원, 한국건축역사학회와 함께 마애불 입불에 대한 안전성을 파악하는 시뮬레이션 연구를 하고 있다. 내년 8월경 결과가 나오기 전에 학술대회를 개최해 전반적인 조언도 구할 예정이다.

마애불은 세우는 것뿐 아니라 ‘원위치’를 찾는 것도 중요하다. 2018년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이 불상 바닥의 시료 5개를 채취해 인근 암반에서 확보한 시료와 비교해 보니, 현재 불상의 다리 쪽 인근에 있는 암벽에서 추락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됐다. 문화재청은 “마애불을 세운다면 본래 자리를 찾는 학술적 연구가 뒷받침돼야 한다”며 “올해 여름부터 관련 연구도 함께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열암곡 마애불은 세우기만 하면 최소 국가지정문화재 보물급으로 인정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국가지정문화재를 지정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로 고려되는 ‘역사성’과 ‘완전성’을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경주시 연구사업 자문위원인 임영애 동국대 문화재학과·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는 “얼굴 원형이 어떤 깨짐도 없이 완전하게 보존된 유일한 신라 마애불이라 완전성을 갖췄을 뿐 아니라 석굴암 본존불 조성 이후인 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돼 역사성까지 갖췄다”며 “국가사적지인 남산을 훼손하지 않고 마애불을 세울 해법을 모두 합심해서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소연 문화부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