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왜 나야? 다른 배우들 많잖아?’ 섭외를 받고 이 말부터 나왔죠.”
배우 유해진(52)이 1997년 ‘블랙잭’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인 이후 25년 만에 처음 왕 역할을 제안받고 감독에게 한 말이다. 그는 23일 개봉하는 사극 영화 ‘올빼미’에서 조선 16대 왕 인조로 열연했다. 현대극과 사극을 막론하고 그는 주로 코믹한 캐릭터를 맡아왔다. 사극만 좁혀보면 ‘왕의 남자’(2005년)에선 광대 육갑 역을, ‘해적: 바다로 간 산적’(2014년)에선 해적에서 산적으로 전향하는 철봉 역을 맡는 등 천민을 연기해왔다.
그런 그에게 인조 역을 제안한 이는 ‘왕의 남자’ 조감독이었던 안태진 감독. 안 감독은 그의 장편영화 데뷔작 ‘올빼미’의 주인공 인조에 기존 이미지로 볼 때 전혀 어울리지 않을 법한 유해진을 섭외하는 파격적인 선택을 했다.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유해진은 “안 감독은 나를 택한 이유로 ‘조금 다른 왕이었으면 한다’고 하더라. 그래서 ‘그렇지 내가 하면 확 다르겠지’라고 했다”라며 웃었다.
23일 개봉하는 영화 ‘올빼미’에서 조선 16대 왕 인조 역을 맡아 열연한 배우 유해진. NEW 제공
영화는 인조실록에 실린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1612~1645)의 죽음에 관한 역사적 사실에 상상을 더한 스릴러물. 병자호란 이후인 1637년 청나라에 인질로 갔다가 8년 만에 돌아온 소현세자는 인조 23년(1645년) 귀국 한 달여 만에 사망한다. 사인은 학질(말라리아)로 기록돼있지만 시신 외관으로 볼 때 인조가 의관 이형익을 시켜 독침을 놓아 죽인 것이라는 독살설이 제기돼왔다. 영화는 빛이 없는 경우만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는 궁중 내의원 시각장애인 침술사 경수(류준열)라는 가상의 캐릭터를 세자의 죽음을 목격한 유일한 인물로 등장시킨다. 주로 어스름한 시간을 배경으로 세자가 죽는 모습과 진범을 찾는 과정이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그려진다. 권력욕 앞에 부정마저 버린 비정한 아버지이자 언제 왕위를 뺏길지 몰라 병적인 불안감에 시달리는 왕을 연기하는 유해진은 이 긴장감을 최고치로 끌어올리는 일등 공신이다.
유해진은 “인조를 표현할 때 더도 덜도 말고 역사적 기록에 나오는 내용 그대로만 가지고 연기하자고 생각했다”며 “인조의 광기를 표현할 땐 영화 촬영 현장이라기보다 무대에서 연극 한 편을 한다는 생각으로 임했다”고 했다.
그는 안면마비로 한쪽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떨리거나 증상 악화로 한쪽 입이 비뚤어지면서 말을 할 때 웅얼거리는 모습까지 자연스럽게 소화해냈다. 그는 “주변에 안면마비를 앓는 분들의 모습을 참고했다”며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인조의 마지막 모습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모습이다”라고 했다.
처음 왕을 맡은 그의 모습을 시사회를 통해 먼저 접한 언론과 평단은 성공적인 연기 변신이라며 찬사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관객들에게 정식으로 영화를 선보이기에 앞서 베테랑 배우는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