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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은행들이 혁신을 못 하는 이유[광화문에서/유재동]

입력 | 2022-11-15 03:00:00

유재동 경제부 차장


우리나라의 시중은행들은 ‘금융회사’일까, ‘금융기관’일까. 금융권을 취재해 본 기자라면 누구나 가끔은 고민해 봤을 문제다. 경영 성과를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사기업의 특성을 감안한다면 ‘금융회사’, 금융 시스템 안정이나 소비자 보호 같은 은행의 공공성을 중시한다면 ‘금융기관’이 더 맞을 것이다. 하지만 우린 아직도 마땅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두 용어를 혼용한다. 은행들을 오래 취재해 왔지만 이렇게 성격이 묘하고 뭐라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조직은 찾지 못했다.

겉모습만 보면 은행도 멀쩡한 민간기업이다. 다른 기업과 마찬가지로 영업 활동을 통한 수익 창출을 주된 목적으로 한다. 증시에 상장돼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고 주주에게 배당도 한다. 가장 다른 점은 정부가 신규 사업자의 진입을 엄격히 제한하는 과점(寡占) 회사라는 점이다. 덕분에 소수의 은행들은 국내외 시장에서 피 말리는 경쟁을 하는 다른 기업들과 달리 안정적인 이자 마진을 나눠 가지면서 생존을 보장받고 있다. 정부는 은행들이 망하지 않게, 그렇다고 과도한 폭리를 취하지도 않게 밀착 관리한다.

정부는 은행들에 이런 특혜를 주는 대가로 각종 규제를 가한다. 말이 규제지 실제로는 은행들의 모든 영업행위를 조종, 통제한다. 예대마진이나 각종 수수료에 대한 간섭이 대표적이다. 은행들은 국정과제나 정책 목적을 위해서도 수시로 동원된다. 금융당국은 최근 주요 은행장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자금시장 안정을 위한 90조 원의 채권 매입을 지시했다. 은행은 자영업자나 취약계층의 채무를 탕감하고 이자를 감면하는 일에도 자주 호출된다. 손실이 뻔하지만 군말 없이 따라야 한다.

은행은 인사도 당국의 눈치를 봐야 한다. 얼마 전 금융감독원장은 라임 사태로 중징계를 받은 우리금융 회장에게 “현명한 판단”을 언급하며 사실상 사임을 압박하는 듯한 말을 했다. 경영진 선임을 담당하는 이사회가 뻔히 있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최고경영자(CEO) 인사에 간여한 것으로 해석됐다. 우리은행 안팎에서는 벌써부터 누가 권력의 ‘점지’를 받아 차기 회장이 될지 뒷말이 무성하다. 정상적인 민간기업이라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당연하다는 듯이 진행된다.

금융당국의 관치(官治)는 은행의 공공성을 감안했을 때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은행이 부실에 빠졌을 때 경제 전체에 어떤 충격이 생기는지도 우리는 뼈저리게 경험했다. 하지만 당국의 숨 막히는 간섭 속에서 우리 은행의 경쟁력이 수십 년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면 그건 또 다른 문제다. 따뜻한 보호막 안에서 망할 걱정 안 하고 편하게 돈을 버는 동안, 은행은 대단한 경영 혁신도 없이 임직원들이 국내 최상위 수준의 연봉을 받는 꿈의 직장이 됐다. 그 피해는 오롯이 소비자에게 돌아온다.

은행이 혁신을 못하는 데는 스스로의 책임도 크다. 은행들이 겉으로는 “규제 완화”를 외치면서도 실상은 당국의 뒤에 숨어서 더 세밀한 지침을 요구하는 사례를 지금까지 많이 봤다. 정부가 은행을 말 잘 듣는 하청업체쯤으로 길들이려 하고, 은행도 자신들의 편안한 생존을 위해 기꺼이 길들여지기를 바라는 규제 환경이 바뀌지 않고서는 진정한 금융 혁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