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저’는 과거 한때 부(富)의 상징이었다. 비즈니스에서 성공한 회장, 사장들이 타고 다닌다고 해서 ‘회장님 차’로 불렸다. 1986년 출고 당시 가격이 최고 2000만 원대 후반으로 소형 아파트 한 채 값과 맞먹었다. ‘모래시계’ 같은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조폭 두목들이 타는 ‘형님 차’로도 알려졌다. 부유층 자제들이 “건방지게 그랜저를 가로막는다”며 차선 변경으로 시비가 붙은 다른 차 운전자를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1세대 그랜저는 모서리가 네모난 박스에 바퀴를 달아놓은 듯한 디자인 때문에 ‘각 그랜저’라고 불렸다. 곧은 직선의 디자인이 자칫 투박해 보일 수 있는 대형 차체에 강인하고 단단한 이미지를 심어줬다. 현대차가 어제 새로 선보인 7세대 그랜저는 36년 전의 이 모델 디자인을 곳곳에서 차용했다. 첨단 기술을 적용한 차량의 외관에 복고풍의 레트로 감성을 덧입혔다. 그랜저를 고급 국산차의 대표 모델이자 성공의 상징으로 기억하는 기성세대의 향수를 소환한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자동차는 단순한 이동수단을 넘어선다. 개인의 지위를 드러내는 상징적 아이콘이자 한 시대의 경제, 사회상을 반영하는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랜저가 출시된 해는 한국이 아시아경기를 치러내고 1988년 서울 올림픽이라는 굵직한 국제 행사 개최를 앞둔 때였다. 가파른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부가 팽창하던 시기, 고층 아파트의 숲이 들어서고 집집마다 컬러TV가 놓였다. ‘마이카’의 개념이 생겨난 것도 이즈음이었다. 자동차로 재력을 과시하고자 했던 욕구가 치솟은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30여 년 전의 자동차 콘셉트를 되살리는 시도는 그동안 쌓아온 브랜드 파워와 성능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으로 볼 수도 있겠다. 세계시장을 누비는 한국 차의 품질은 변변한 자체 기술 하나 없어 일본 기업과 손잡아야 신차를 개발할 수 있었던 1980년대와는 급이 달라졌다. 그래도 자율주행을 비롯한 첨단기술 개발의 길은 여전히 멀다. 과거 유산에 바탕을 둔 복고 열풍 속에서도 자동차 업계의 시선은 더 앞선 미래에 박혀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