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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의 도발]윤석열의 ‘무심한 사람들(careless people)’

입력 | 2022-11-17 10:06:00


경북 봉화 광산 사고에서 열흘 만에 구조된 박정하 씨의 인터뷰를 들으며 혼자 목이 메인 적이 있다. 혹시 사람들이 나를 포기하면 어떡하나, 구조를 포기하면 어떡하나, 이런 생각이 들지는 않았느냐고 7일 ‘김현정의 뉴스쇼’ 앵커가 짐짓 물었을 때다. 목소리도 선한 그가 천천히 말했다.

“그런 생각은 한 번도 안 했어요, 제가. 왜냐하면 제가 광부들의 습성을 좀 알아요. 동료애라는 건 다른 직종의 동료들보다 굉장히 더해요, 사람들이…진짜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조직 같은 그 형태의 사람들인데, 조금 사람다운 냄새나는 그런 질릴 정도로의 끈기 있는 인간애는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절대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살기에…끈기 있는 인간애가…그래서 동료들이 절대 구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221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고 했다. 지난달 29일 오후 6시 34분부터 이태원에서 112 신고를 했던 사람들도 그렇게 믿었을 것이다. 압사 사고 일어나기 전에 경찰이 달려올 것이라고.

경북 봉화군 아연 광산 매몰사고 현장에서 구조대가 구조된 광부들을 병원으로 이송하고 있다. 경북소방본부 제공

● 안전주무장관 이상민이 무슨 고생을 했나 
물론 그 안타까운 참사 현장에 늦게나마 달려왔던 경찰과 소방대원들은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광부들보다 훨씬 잘난, 윤석열 정부 꼭대기의 높은 몇몇 분들은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책임회피에 급급한 나머지 질릴 만큼 끈끈한 ‘그들만의 인간애’를 과시해 국민적 신뢰를 떨어뜨리고 있다. 심지어 16일 동남아시아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윤 대통령은 마중 나온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과 악수하며 “고생 많았다”고 격려까지 했다.

정부조직법에 따르면, 안전 및 재난에 관한 정책을 수립·총괄·조정하고 비상대비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주무장관이 바로 행안부 장관이다. 윤 대통령은 순방을 떠날 때도 이상민의 어깨를 남들 보란 듯이 툭툭 두드려주고 비행기에 올랐다. 이태원 참사를 백날 수사해봐라. ‘내 식구’ 이상민은 못 건드린다…는 신호로 읽히지 않은 분은 손들어보기 바란다.
● ‘내 식구주의’에 사회자본이 무너진다 
이태원 참사를 수사 중인 경찰 특별수사본부가 같은 날 이상민을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피의자 신분에 올려놓긴 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표 나게 이뻐하는 충암고 후배 장관을 어떤 간 큰 경찰이 감히 수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문제는 대통령의 그런 ‘내 식구주의’ 때문에 윤 정부의 공정과 상식, 그리고 법과 제도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11월 7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이태원 핼러윈 참사 현안질의에 참석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답변하고 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다시 태어난다면 한국에서 살겠습니까’라는 무시무시한 책에서 한국은 한마디로 불신사회라고 이재열 서울대 교수는 진단했다. 그게 벌써 2019년이다. 문재인 정권의 내로남불이 끔찍해 과반수 국민이 정권을 갈아치운 거다. 그런데 윤 대통령까지 내 식구만 싸고돈다는 건 국민에 대한 ‘배배배신’이다.

그리하여 신뢰라는 사회자본이 추락하면 이 정부만 실패할 공산이 커지는 게 아니다. 대한민국이 선진국 문턱에서 고꾸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아니 우리는 계속 불신·불만·불안·불운·불행에서 헤어날 수 없다는 것을 왜 모르는지 안타깝다(노파심에 밝히자면 나는 이상민과 일면식도 없다).
● 위대한 개츠비가 알려준 상류층의 죄

이상민의 잘못은 안전과 재난정책, 비상대비의 주무장관으로서 책임지는 자세를 안 보였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서울대 법대 4학년 때 사시에 합격해 판사가 됐고 2007년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퇴직한 뒤에도 그는 거대 로펌 변호사, 대기업 사외이사, 국민권익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하면서 사회 지도층으로서 참 폼 나게 살아온 사람이다.
‘그들은 무심한 사람들이었다. 이것저것, 동물과 사람들을 망가뜨리고 나서는 자신들의 망망한 무심이 자리하고 있는 돈 속으로, 또는 그들을 짝으로 유지시켜주는 그 무엇인가로 되돌아갔고, 자신들이 벌여놓은 난장판은 다른 사람들이 치우도록 했다.’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중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말미에서 미국 상류계급(더 정확히는 상류계급의 자격이 없는 톰과 데이지)을 묘사한 대목이다. 여기서 ‘무심한 사람들’(careless people)이라는 표현은 중요하다. 번역자에 따라 careless는 ‘무책임한’ ‘경솔한’으로 나오기도 하고 영한사전에는 부주의한, 조심성 없는, 되는 대로의, 무관심한…으로 등장한다.

이상민이 “누군들 폼 나게 사표 던지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겠나”라는 문자인터뷰를 날렸을 때, 상류계층의 이 치명적 무심함이 문득 떠올랐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영화화한 ‘위대한 개츠비(워너브러더스, 2013년 개봉)’의 개츠비(뒷줄 왼쪽,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와 데이지(케리 멀리건 분).

● 이상민 장관, ‘문 정권의 조국’처럼 될 텐가 
아무리 지위가 높고 돈이 많아도 미국선 세상과 타인에 대한 배려와 책임, 감성이 없으면 상류계층에 못 낀다. 미국서 9년간 미 연방 공무원으로 일한 김명훈이 ‘상류의 탄생’에 쓴 말이다. 지난여름 윤 대통령은 “퇴근하면서 보니 벌써 다른 아래쪽 아파트들은 침수가 시작되더라”고 했던가.

이상민이 눈물을 머금고 물러나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젊은 목숨 158명이 사라졌는데 책임지는 공직자가 없다니 X팔려 못 살겠다. 전임 문 정권 때는 조국 당시 법무부 장관이 물러날 때 물러나지 않고 질질 끄는 바람에 정권에 큰 부담을 안겼다. 고교 선배 윤 대통령을 위해서라도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정치적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

윤 대통령은 이상민 사퇴를 계기로 지난 6개월은 없었다 치고, 깨끗하게 새 출발 해주기 바란다. 윤 대통령을 뽑은 국민이 제발 마음 편히 지지할 수 있도록.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