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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슬픔 그리고 양자역학[이기진 교수의 만만한 과학]

입력 | 2022-11-18 03:00:00

이기진 교수 그림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죽음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찾아올 때 그 의미를 알게 된다. 을지로3가역은 나에게 가장 슬픈 지하철역이다. 몇 해 전 아버님이 을지로3가에 있는 백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아버님이 입원하신 후, 나는 학교 일정을 끝마치고 지하철을 타고 을지로3가역에 내려 죽을 사들고 병문안을 하러 갔다. 하루하루 수척해져가는 아버님을 뵙고 나서 지하철역으로 터벅터벅 내려갈 때는 지구의 종말 같은 슬픔이 밀려왔다.

그 후 어머님이 돌아가셨고, 사랑하는 아내마저 갑자기 현실의 세계에서 사라졌다. 몇 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은 절대 사라지지 않고 쌓여간다. 지구의 무게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된다.

물리학적 죽음이란 무엇일까. 죽음은 살아 있는 생명체가 원소로 분해되는 과정이다. 유기물에서 무기물로 분해되는 과정. 결국 양자 상태의 입자가 된다. 우주의 최소 단위인 양자로 우주에서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게 된다. 마치 물 분자가 두 개의 수소와 한 개의 산소로 쪼개져 존재하는 것처럼.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없다. 이렇듯 죽음은 단지 원소로 나뉘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죽은 이의 정신과 슬픔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물리학 이론으로 ‘평행우주’와 ‘다중우주’ 모형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 세계가 아니라, 평행 선상에 또 다른 우주 세계가 존재한다는 개념이 ‘평행우주’ 이론이다. ‘다중우주’ 이론은 같은 시간을 공유하지만 공간과 차원이 다른 수없이 많은 우주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 평행우주와 다중우주는 양자역학 이론이 만들어낸 이론적 세계다. 지구상의 그 어떤 존재도 양자역학의 엄격한 원리를 벗어날 수 없다.

양자는 우주 공간 어디에 있든 항상 두 가지 선택권이 있다. 한 가지를 선택하면, 이 선택에 따라 다른 세계가 남는다. 왼쪽으로 가는 인생이 있으면 가지 않은 오른쪽의 인생이 남아 있는 것처럼, 이렇게 무한히 분화하는 두 개의 평행우주가 존재하게 된다.

‘다중우주’ 역시 매 결정의 순간 다른 우주가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 개가 아니라 무한 개의 우주가 존재한다. 끈 이론에 의하면 가능한 우주의 상태의 수는 10에 500승개다. 이만큼의 다중우주가 존재하고 있다면, 남겨진 슬픔 하나는 이런 우주 속에 숨어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이태원에 산 지 거의 20년이 되어간다. 이국적 풍경을 지닌 골목 속 숨겨진 술집과 음식점은 퇴근 후 제자들과 친구들과 함께 마음 놓고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한적한 평일은 평일대로, 젊은 친구들로 붐비는 주말은 주말대로 규칙이 있었다. 하지만 한순간에 그 규칙이 무너져버렸다. 그리고 나에게 또 하나의 슬픈 지하철역으로 변해버렸다. 이른 아침 가방을 메고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은 마치 블랙홀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또 다른 슬픔이다. 이 우주에서, 지금의 삶 속에서, 막다른 슬픔이기를 바라며 지하철을 탄다.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