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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맥값 日 3890원 vs 韓 4900원… 日 ‘엔저’ 바람에 관광객 북적[글로벌 포커스]

입력 | 2022-11-19 03:00:00

“일본은 바겐세일 중” 엔화 가치 하락 현장
10월 日찾은 외국인 50만명 육박… “이렇게 쌀수가 있나” 곳곳 환호
백화점 매출도 1년 전의 6배로… 日정부 “경기부양 기회로 활용”
주요국에 무비자 관광 잇단 확대… 외국인들 부동산 투자에도 관심



16일 일본 도쿄의 유명 관광지 아사쿠사 상점가가 관광객으로 북적이고 있다(왼쪽 사진). 올해 내내 일본 엔화 가치가 하락하면서 자국보다 싼 값으로 쇼핑과 여흥을 즐길 수 있는 일본으로 해외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다. 지난달 26일 도쿄 시나가와에서 열린 ‘2022 한일 산업교류대전’ 참가자들이 부스를 둘러보고 있다. 일본이 최근 해외 입국자에 대한 코로나19 방역 지침을 완화하자 일본을 찾는 한국 기업인 또한 늘었다. 도쿄=이상훈 특파원 january@donga.com


“식당에 갈 때마다 놀랍니다. 이렇게 가격이 쌀 수 있다니….”

16일 일본 도쿄 아사쿠사의 유명 관광지 센소지(淺草寺)에서 만난 캐나다인 디나 씨(30)는 ‘일본 여행이 어떠냐’는 기자의 질문에 “낫 익스펜시브(not expensive)”를 연발했다.

캐나다 밴쿠버에서 온 그는 친구와 닷새간 여행 중이라고 했다. 디나 씨는 “어제는 초밥 가게에서 오마카세(주방장에게 맡기는 특선 요리)를 시켰는데 4000엔(약 3만8500원)이었다. 밴쿠버였으면 100캐나다달러(약 10만 원)로도 부족했을 것”이라고 했다.

센소지 앞 상점 ‘나카쓰카’에서는 한입에 들어가는 미니 단팥빵을 10개에 500엔(약 4800원)에 팔고 있었다. 60대 여성 점원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와 비교하면 관광객이 3배 늘었다. 특히 외국인이 많아져 감사할 따름”이라고 반겼다. 이 점원과 대화를 나누는 5분 사이에 한국인 관광객 무리도 세 팀이 다녀갔다. 최근 일본이 주요국 시민들에게 무비자 관광을 허용하자 한국 관광객 또한 일본을 많이 찾는다는 점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나라나 미국 달러에 대한 자국 통화 가치 하락, 즉 환율 상승은 외국인 관광객 맞이, 해외투자 유치 등에 유리하다. 동시에 수입 물가가 올라 불리한 면도 있다. 엔화 가치는 올해 내내 달러에 대해 주요국 통화 중 가장 큰 하락폭을 기록했다. 최근 하락세가 멈추긴 했지만 여전히 지난해 말과 비교하면 21% 이상 떨어졌다.

엔화 가치가 주요국 통화 중 가장 많이 떨어지자 일본 정부는 엔저(엔화 약세)를 활용해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뜻을 강조하고 있다. 그 대표적 예가 해외 관광객 유치인 셈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최근의 엔저 현상으로 외국인에게 일본은 ‘바겐세일’ 상태”라고 진단했다.

다만 환율 등 외부 요인에 의해 경제가 좌우되는 상황을 두고 “개발도상국 같은 구조가 됐다”며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다. 가뜩이나 경기가 살아날 만하면 마이너스(―) 성장을 보이며 침체가 길어지고 있는데 엔저에만 의존하는 현상이 이런 구조를 고착화시킨다는 것이다.
○ 외국인 덕에 백화점 매출 급증… 부동산 매입도 활황

최근 일본에서 분위기가 좋아진 업종 중 하나는 백화점이다. 백화점 업계는 내수 침체, 온라인 쇼핑 보급, 코로나19 확산의 3중고를 겪었다. 지난해 매출(4조4200억 엔)이 10년 전의 3분의 2로 줄어들 정도로 대표적인 불황 업종이었다.

하지만 최근 일본이 한국, 미국, 대만 등의 외국인 무비자 관광을 재개하면서 백화점 매출이 급증했다. 면세 판매 기준 다이마루 마쓰자카야(大丸松坂屋) 백화점의 지난달 매출은 1년 전보다 5.9배 늘었다. 미쓰코시 이세탄(三越伊勢丹) 백화점 역시 4.9배로 증가했다. 코로나19 확산 전인 2019년 월 매출의 60∼70% 수준을 회복한 것이다.

일본 최대 아웃렛 매장인 후지산 인근 ‘고텐바 프리미엄 아웃렛’에는 코로나19 직전 대비 30% 수준의 외국인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다. 과거 최대 구매객이었던 중국인들이 엄격한 방역 통제로 오지 못해 회복세는 기대만 못하지만 외국인 방문객 대부분은 저렴한 가격에 만족한다.

한 대만인 고객은 “나이키, 펜디 등의 신발 가격이 대만에서는 2배 비싸다”고 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한 관광객 역시 “사고 싶은 브랜드의 가방이 인도네시아에서는 5만 엔 정도인데 여기서는 3만 엔에 팔고 있어 놀랐다”고 반색했다.

일본정부관광국(JNTO)에 따르면 올 10월 한 달간 일본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49만8600명이다. 1개월 전(20만6500명)의 배를 넘었다. 특히 한국(12만2900명)이 미국(5만3200명) 등을 제치고 압도적 1위에 올랐다. JNTO 측은 “코로나19로 제한됐던 한국, 대만 등의 항공사, 여행사와의 공동 광고를 순차적으로 개시하고 여행박람회 개최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최근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5% 이상을 기록하며 고물가에 시달리는 한국인에게 일본은 ‘저렴한 나라’다. 맥도널드 빅맥 햄버거(한국 4900원, 일본 410엔·약 3890원), 스타벅스 아메리카노(한국 4500원·일본 410엔)의 가격 차이가 보여준다.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주요국과 비교하면 일본의 상대적인 낮은 물가와 현재의 환율 상황은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한 큰 무기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가 지난달 말 종합 경제대책을 발표하면서 엔저를 살려 일본 곳곳의 매력을 세계에 알리는 ‘관광 재시동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미 달러 기준 가격이 대폭 떨어진 일본 부동산을 사려는 외국인 투자자도 늘고 있다. 과거에는 외국계 대형 펀드가 수천억∼수조 원 수준의 대형 상업용 빌딩을 샀다면 최근에는 외국인 개개인이 아파트, 꼬마 빌딩 등을 사는 사례가 적지 않다.

한국인 백모 씨는 도쿄 신주쿠의 5층 빌딩을 갖고 있다. 그는 이 빌딩을 통해 연 5%가량의 수익률을 올리고 있다며 “엔저 효과로 수익률이 좋아져서 추가 투자를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교토, 오사카 등 중국인에게 인기가 높은 간사이 지역에는 중국인만 상대하는 부동산 업체 수십 곳이 성업 중이다. 한 업체는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지난해에는 월 50건가량 상담이 들어왔다. 지금은 100건 가까이 된다”고 밝혔다.
○ 외국인 근로자는 월급이 줄어 한숨
해외에서 일본에 놀러 오거나 투자할 때는 엔저가 반갑지만 일본 내에서는 고통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다. 일본 내에서 엔저의 직격탄을 맞은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외국인 근로자다.

사이타마현의 한 금속 공장에서 일하는 베트남 근로자 A 씨는 요즘 귀국을 고민하고 있다. 매달 20만 엔 월급을 받는 그는 3분의 2를 고국의 가족에게 부친다. 나머지 돈을 자신의 생활비로 쓴다. 최근 엔 하락으로 환전할 때 받는 미 달러가 갈수록 줄고 있다. 올 초 대비 베트남에 보내는 송금액 또한 20%가량 줄었다.

그렇다고 일본 생활이 넉넉해진 것도 아니다. 미국, 유럽보다 덜 올랐다지만 최근 일본도 식료품 가격이 10∼20%씩 올라 서민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 그 역시 유통기한이 지난 제품을 파는 할인 매장을 즐겨 찾는다. A 씨는 “5년 전 함께 일본에 온 베트남 친구들의 절반 이상이 일본을 떠났다. 내년에도 월급이 안 오르면 나도 더 이상 일본에 살기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인건비가 저렴해 외국인 인력을 필요로 하는 업체는 일본에서도 늘어나는 추세다. 하지만 외국인 근로자 입장에서는 한국 등에 비해 절대 임금 액수가 낮고 엔저 현상으로 환전액마저 줄어든 일본을 선택할 이유가 적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외국인 정보기술(IT) 인력업체 ‘FPT저팬’에서 올 7월 이후 일본 취업을 원하는 베트남인이 40% 감소했다.

외국인 인력을 알선하는 일본아시아청년교류협회의 시로타 신고 사무국장은 “예전에는 외국인 근로자를 3명 모집하면 2∼3배씩 몰려들었다. 지금은 미달되는 사례도 많다”며 “기업들도 사정이 좋지 않아 외국인 근로자를 위해 임금을 올려주긴 어려운 상황”이라고 전했다.

환율이 오를 때 가장 큰 장점으로 꼽히는 수출 가격 경쟁력 상승도 최근에는 효과가 작아졌다. 일본 기업의 상당수가 제조업 거점을 해외로 이전한 탓이 크다. 일본국제협력은행(JICA)에 따르면 일본 기업의 해외 생산 비중은 2001년 24.6%에서 지난해 33.8%로 높아졌다.

일부 기업은 엔화 가치가 낮은 지금이 일본에 돌아올 기회라고 판단해 일부 생산 설비를 일본 국내로 돌리고 있다. 생활용품 기업 ‘아이리스 오야마’는 수송비 절감을 위해 올 9월 생산 설비를 중국에서 사이타마현 등으로 옮겼다. 이곳은 생산 비용 20% 절감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자동차 내비게이션 및 카스테레오 제조업체 ‘JVC 켄우드’ 또한 인도네시아 공장을 올해 나가노현으로 이전했다.

다만 실제 공장 이전을 추진하거나 계획 중인 기업은 일본 내에서 10% 미만이라는 조사 결과가 있다. 생산설비 이전에 막대한 투자가 들어가는데 성장성이 낮은 일본 제조업 특성상 이런 결단을 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 “비용 상승분 가격 전가 어려워” 하소연
지난해 니혼게이자이신문의 레이 나카후지 기자가 쓴 책 ‘저렴한 일본(安い日本)’은 최근 일본의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 책은 1980∼90년대 거품 경제 시절 세계에서 가장 물가가 높았던 일본이 지금은 임금 및 물가가 주요국 중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현실을 상세히 분석했다. 저자는 “물가가 저렴하면 살기 편하다고 생각하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수익이 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며 일본 경제가 임금은 동결되고 소비는 정체돼 수요가 늘지 않는 악순환에 빠졌다고 우려했다.

일본 근로통계에 따르면 물가 변동을 반영한 올 9월 실질 임금은 1년 전보다 1.3% 줄었다. 벌써 6개월 연속 감소세다. 임금이 소폭 올라도 물가가 더 많이 올라 실제 구매력은 감소했다는 뜻이다. 장기 경기 침체가 이어지는 일본에서는 국민들의 소비력이 떨어져 조금만 가격이 올라도 바로 지갑을 닫는 현상이 벌어진다. 올 3분기(7∼9월) 국내총생산(GDP)이 지난해 3분기 이후 1년 만에 마이너스(―)로 돌아선 가장 큰 요인 또한 개인 소비 감소로 꼽힌다.

닛세이기초연구소의 우에노 쓰요시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환율, 원자재 가격이 급격하게 움직이면 중소기업이나 가계의 부담이 커진다”며 “내수 소비가 얼어붙고 경기 회복도 어려워지는 위험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렇다 보니 주요 기업들은 원자재 값 상승, 엔저에 시달려도 좀처럼 가격을 올리지 못한다. 정보업체 ‘데이코쿠 데이터뱅크’의 9월 조사에 따르면 일본 기업들의 비용 상승 대비 가격 전가율은 36.6%에 그쳤다. 생산 및 유통 비용이 1000원 올라도 실제 가격은 366원밖에 올리지 못한다는 뜻이다. 나머지 상승분에 대해서는 이윤을 낮추고 내부 비용을 절감하는 식으로 떠안는다. 일부 대기업들은 협력업체에 떠넘기는 경우도 있지만, 중소·영세 기업들은 그조차 불가능하다.

일본 내부에서는 근본적으로 일본 경제의 기초 체력이 약해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10여 년간 이어온 초저금리 정책에 정부, 기업, 가계가 안주하고 경기 회복도 기대보다 못하다 보니 소폭의 금리 인상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환율 변화에 따른 외국인 관광객 증가, 수출 가격 경쟁력 상승 등은 한국이나 일본 모두 경제 불황의 근본적 처방이 되기는 어렵다. 구조개혁을 통한 생산성 향상 및 성장이 경제 체력을 키워줄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다이와종합연구소의 고다마 다카시 금융조사부장은 최근 보고서에서 일본 경제 상황을 이렇게 짚었다.

“정부 관계자들은 엔저 현상을 시장의 지나친 움직임 탓으로 돌리지만 실제로는 훨씬 뿌리 깊은 문제다. 근본적으로는 생산성의 차이(하락)에서 비롯된 것이다. 개발도상국 같은 정책으로 정치 경제적 자원을 낭비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도쿄=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