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경찰 수사만으론 온전한 책임 규명 어려워 정책적·행정적 책임도 함께 규명해야… 참사 재발 막고 피해자 억울함도 풀어
천광암 논설실장
15대 국회는 1999년 초반 ‘환란 조사 특위’를 구성해 청문 활동을 한 뒤 339쪽 분량의 국정조사 결과보고서를 채택했다. 보고서는 ‘환란 극복 교과서’로 불릴 정도로 외환위기의 원인과 발생 과정, 책임 소재, 교훈, 대책 등을 포괄적으로 담았다.
보고서는 환란의 주된 원인 중 하나로 위기 당시 강경식 경제부총리와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의 무능함과 안이함,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늑장 보고를 꼽았다. 보고서는 또 무모한 환율방어로 인한 외환보유액 소진, 종금사 인허가 남발, 성급한 대외개방, 소극적인 산업 구조조정 등 보다 구조적인 정책 실패도 광범위하게 지적했다. 보고서만 일별해도 외환위기의 본질을 얼추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수사를 통한 책임 추궁은 실패 그 자체였다. 환란 원인 중 지엽적인 한 부분에 해당하는 ‘정책 담당자(강 부총리와 김 수석)들의 늑장보고’에 대해서만 기소·재판이 진행됐다. 범죄 구성요건을 갖춘 행위에 대해서만 객관적인 증거를 토대로 엄밀한 인과관계를 따지는 형사소추의 성격상 그 이상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법원의 판단은 1심, 2심, 3심 모두 무죄였다.
힐즈버러 참사의 현지 경찰 책임자에 대해 영국 사법부의 최종 판단이 내려진 것은 사고 후 30년이 지난 2019년 11월의 일이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혐의에 대해 영국 프레스턴왕실법원의 배심원단이 내놓은 평결은 무죄였다.
아카시 참사의 현지 경찰 책임자에 대한 일본 사법부의 최종 결정은 사고로부터 약 12년 뒤 나왔다. 경찰 수사 결과 과실치사 혐의로 송치된 아카시경찰서의 서장과 부서장에 대해 검찰은 “혐의 없음”으로 불기소 처분을 했다. 유족들의 반발로 길고 지루한 불복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서장은 사망했고, 부서장은 공소시효가 끝났다는 이유로 면소(免訴) 판결을 받았다.
이태원 압사 참사에 대한 경찰의 수사가 시작된 지 20일 가까이 지났다. 경찰 수사의 칼날은 주로 현장 지휘관들을 향하고 있다. 지난 17일 행정안전부와 서울시, 서울시 자치경찰위원회 등을 압수수색했지만 여론에 등 떠밀리듯 이뤄진 ‘뒷북 수색’이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나 윤희근 경찰청장,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에 대해 경찰이 제대로 된 수사 의지를 갖고 있다는 흔적이나 징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설령 경찰이 강력한 수사 의지가 있더라도 ‘윗선’의 사법적 책임을 규명하기까지는 보통 험난한 길이 아니다. 수사와 재판만 쳐다보고 있다가는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일’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책임 규명이 제대로 안 되면 재발 방지 대책인들 제대로 된 것이 나올 리 없다.
여야가 대립 중인 국정조사와 관련해서는 환란조사 특위 등의 전례를 참고해서 합의점을 찾아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야당만의 반쪽 국조는 소모적인 정치공방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 국조를 피해서는 안 된다. 중립적인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진상조사도 서둘러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증거와 증언이 착종(錯綜)하고 흐릿해지는 것은 수사의 어려움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영국 힐즈버러 참사에 대한 배심원단의 무죄 평결에 한 유족은 이렇게 절규했다. “그럼 누가 96명을 무덤 속에 밀어 넣었단 말이냐. 대체 누구 책임이라는 것이냐.”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 유족들에게도 이런 한을 남기지 않으려면 수사는 수사, 국조는 국조, 전문가 조사는 전문가 조사대로 사고 원인과 책임 소재를 철저하게 밝혀내야 한다.
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