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학계 일각에선 고구려, 백제, 신라 중심의 삼국시대론을 비판하며 사국시대론을 주장한다. 대가야, 소가야, 금관가야, 아라가야 등 가야 여러 나라가 6세기 무렵까지 엄연히 존재했고, 특히 대가야의 경우 국제적 외교 무대에서 활약했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대가야가 두각을 나타낸 시점은 5세기 후반이다. 그 무렵 백제가 고구려의 침공을 받아 위험에 빠지자 대가야는 백제의 후방을 공격, 섬진강 및 금강 상류 지역을 차지했고 그 여세를 몰아 가야 맹주의 지위를 다졌다.
그러나 강국이 되려던 대가야의 꿈은 한 세대가 채 지나지 않아 위기를 맞았다. 백제와 신라가 대가야를 견제하며 공세를 펴자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에 따라 강국이 되려 한 대가야의 꿈도 물거품이 되었다. 다만 근래 속속 발굴되는 대가야의 유적과 유물만이 사라진 왕국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항구 획득해 中과도 거래한 대가야
고령 지산동에서 출토된 대가야 양식 금동관(32호분). 대가야 지배층도 신라나 백제처럼 위세를 드러내기 위해 귀금속 장신구를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475년에 이르러 한반도 중남부 지역의 평화를 깨는 전쟁이 벌어졌다. 고구려 장수왕의 대군이 백제의 왕도 한성을 공격해 함락시킨 것이다. 신라는 군사 1만을 보내 구원하였지만, 대가야는 그 길에 동참하지 않고 실리를 추구했다. 남원 운봉고원을 차지한 데 이어 무주, 진안, 장수 등 금강 상류로 진출했다. 이 무렵 대가야 영역에 편입된 전북 동부 지역 곳곳에 큰 고분군이 만들어지고 그 속에 대가야 양식 물품이 다량으로 묻힌다.
가야 연맹에서도 리더십 잃으며 쇠락
대가야의 위세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6세기 초 왕위에 오른 백제 무령왕과 신라 법흥왕은 대가야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무령왕은 5세기 후반 상실한 백제의 옛 땅을 수복했고, 법흥왕은 낙동강을 건너 가야 여러 나라를 차례로 복속했다. 두 나라의 공세에 가야 연맹은 동요했고 대가야의 위상은 흔들렸다.다급한 것은 함안의 아라가야였다. 신라의 공세가 나날이 강해지자 외교를 통해 자구책을 마련하려 했다. 그것이 529년 함안에서 개최된 안라회의(安羅會議)다. 아라가야는 백제와 왜의 힘을 빌려 신라를 압박했지만 기대했던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무슨 이유인지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가야는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한편 신라의 팽창을 우려한 백제 성왕은 가야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541년과 544년에 가야 각국의 유력자들과 왜의 사신을 사비성으로 불러 회의를 진행했다. 그러나 각 나라마다 생각이 달랐기에 회의는 큰 성과 없이 끝났다. 2020년 부여 쌍북리에서 발굴된 백제 대형 건물지에서 대가야 토기 조각 여러 점이 출토되었는데, 조사단은 사비 회의 때 대가야 사람들이 남긴 흔적일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대가야는 이후 가야 연맹에서 리더십을 잃었고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겨우 국권을 유지했다. 그러던 중 562년 9월에 이르러 마침내 최후의 날을 맞이했다. 진흥왕은 대가야가 신라를 배반했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이사부에게 대가야 공격을 명했고 화랑 사다함으로 하여금 그를 보좌하도록 했다. 사다함이 50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먼저 대가야 왕성의 문으로 달려가 흰색 깃발을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이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고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했다고 한다.
군사력보다 외교력 의지한 생존법의 실패
한때 한반도 남부를 주름잡던 ‘큰 가야’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채 신라군의 위세에 눌려 항복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최후의 날에 보여준 대가야의 모습은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기보다 외교력에 의존하여 생존하려 한 잘못된 판단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대가야의 영광을 상징하던 지산동 산정의 거대한 무덤들은 퇴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아직 정확한 위치가 드러나지 않았지만 대가야의 왕궁도 폐허로 변했을 공산이 크다.가야 맹주의 지위를 다진 대가야는 자국 왕을 ‘대왕’이라 칭하며 강국을 꿈꿨으나 백제와 신라의 공세에 쇠락의 길을 걸었다. 6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대가야의 목긴항아리. 뚜껑과 몸체 표면에 대나무 칼로 새긴 ‘대왕’이란 두 글자가 또렷하다. 충남대박물관 제공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