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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에게 ‘미안해’ 전할 1분만 달라 기도” [인터뷰]

입력 | 2022-11-23 03:00:00

봉화 광산서 극적 생환 광부 박정하 씨



경북 봉화군 아연광산에 매몰됐다 9일 만에 생존 귀환한 박정하 씨가 16일 강원 정선군 석탄산업전사 기념비 앞에서 손가락 하트를 그려 보이고 있다. 정선=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정하 형님!”

4일 경북 봉화군 아연광산에 매몰됐던 광부 박정하 씨(62)를 발견한 동료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암흑 속에 고립된 지 221시간 만이었다.

살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채로 엉엉 울었다.

사고가 났던 지난달 26일, 박 씨는 땅 밑으로 곧게 파내려간 수직갱도 190m 부근 수평갱도에서 일하고 있었다.

‘우르르 쾅.’

굉음이 들린 시간은 오후 5시 38분.

하늘에서 쏟아지던 돌과 흙이 잠잠해진 건 그 후로부터 두 시간이 지난 뒤였다.

철제H빔과 나무가 엉킨 슬러지(광물 찌꺼기)가 병목현상으로 낙하를 멈춘 것이다.

기적처럼 박 씨가 있던 곳으로부터 약 20m 위에 지붕이 생겼다.

그 아래서 쓴 생존일기를 16일 박 씨를 만나 들어봤다.》

―지하갱도에 고립된 9일 동안 ‘생존 교과서’ 같은 대응이 화제가 됐다.

“내가 나 자신한테 놀랐을 정도로 침착했다. 살려고 그랬나 싶다. 상황을 보니 구조되기까지 시간이 꽤 걸릴 것 같더라. 생존할 수 있는 시설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철제H빔으로 기둥을 세우고 둘둘 말린 비닐을 찾아서 움막을 지었다. 갱도 안이 습해서 춥거든. 누가 갖다 놓은 비닐인지, 그게 없었다면 체온 유지가 어려웠을 것이다. 나무판이 20여 장 쌓여 있어서 톱으로 잘라 30cm 크기 장작을 만들었다. 산소 절단기를 이용해서 젖은 나무판에 불을 붙였다. 그 불에 철통만 남긴 전기주전자를 올려 물을 끓였다. 첫날은 커피믹스 두 봉으로 났다.”

―나흘 동안 밖으로 나갈 길을 계속 찾으셨다고….

“갈 수 있는 갱도는 전부 가 봤다. 이튿날은 ‘여기서 겁을 먹으면 몸도 말을 안 듣는다’며 불안해하는 동료를 달래면서 수평갱도를 탐색했다. 지상 주차장과 연결된 덤프트럭이 드나드는 넓은 갱도가 생각나서 괭이 2개로 사흘을 팠다. 겨우겨우 10m 남짓 올라갔는데 붕락(崩落)이 막고 있어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정말 눈앞이 캄캄해졌다. 일단 철수를 했다. ‘저녁 먹자’ 그러면서 커피믹스를 끓여 마셨더니 좀 진정이 되더라. 나흘째에는 발파작업에 쓰고 남은 화약 25개로 지붕처럼 얹어진 슬러지 폭파를 시도했다. 10개씩 묶어 두 차례 발파시켜 봤는데 꿈쩍도 안 했다. 결국 출구를 못 찾았다.”

―‘정말 죽는구나’ 하고 생각한 순간 구조되셨다고 들었다.

“마지막 날, 헤드램프를 켜니까 불이 깜박거리는 것이 방전되기 직전이었다. 꺼지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장작은 6개 남았다. 추위가 찾아올 것이었다. 커피믹스는 진즉에 떨어졌고. 같이 있던 동료에게 ‘미안하다, 희망이 없어 보인다. 이제 대비하자’라고 했다. 말을 뱉는 순간, 두려움 서러움 무서움 등 온갖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오더라. 그때부터 시계도 보지 않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발파’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발자국 소리가 나고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것도 같았다. 안 들린다는 동료에게 ‘야야, 그래도 모자 써라. 분명히 들었다’고 말하고는 손을 잡고 엉금엉금 기어나갔다. 10m쯤 가니 옆에서 ‘펑’ 불빛이 들어오고 ‘형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동료가 뛰어오고 있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이라고 느낄 때 무슨 생각을 하셨나.

“아내. 아내한테 미안해서…. 미안하다고 말할 새도 없이 죽는다는 것 자체가 정말 미치겠더라. 미안하다고 말할 1분도 허락이 안 되니까, (전할 수가 없어)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아내에게 왜 그렇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으셨나.

“우리 일찍 만나서 아들 둘 낳고 살았다. 고생 안 시킨다고 했는데 뭐, 헛말 됐다. 동원탄좌에서 일할 당시 노조활동을 10년간 했다. 1987년부터 5년간 노조위원장 하면서 가족에게 많이 소홀했다. 내 욕심 차리지 않고 광부 권익 향상에 헌신했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내 가족이 희생해 준 덕분이었다. 동원탄좌가 문 닫고 폐광근로자협의회에서 활동하는 15년 동안 아내가 가장으로 살았다. 자꾸 못 해 준 것만 생각나서, 잘못 살았구나 후회가 됐다. 두 번째 삶은 아내한테 잘하고, 아들, 며느리 손도 한번씩 잡아주고 그러고 싶다.”


박정하씨는 병원을 나오면서, 새로 얻은 제2의 삶은 가족과 동료를 위해 ‘즐겁게’ 살겠다고 다짐했다. 정선=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갱도 속에서 “광부들의 동료애는 다른 직종의 동료들보다 굉장하다”며 동료들이 구조해 줄 거란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광산은 언제 목숨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터다. 1982년 처음 광산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 출근길 배웅을 나오면 광부 앞을 질러 지나가지도 않았다. 미신 같은 것이다. 요즘에도 젊은 친구들이 일하러는 오는데 하루, 이틀이면 도망간다. 배우고 배부른 사람,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은 버틸 수 없을 만큼 힘들다. 오죽하면 막장이라고 하겠나. 낮에 한 발은 죽음에 걸치고 함께 일하고, 밤에 숙소에서 삼겹살에 소주 한잔 나눠 먹으면 진짜 형제가 된다. 이번에 나를 처음 발견한 동료 신 씨도 ‘쉬란 말 하지 마소’ 하면서 하루 12시간씩 구조 활동을 했다고 들었다.”

―그렇게 힘든 광부의 길에 어떻게 들어서게 되셨나.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아 시작했다. 동원탄좌에서 일하고 있던 장인 따라 일을 배웠다. 당시만 해도 도시근로자 평균 임금의 1.5배를 받았다. 나라에서는 ‘산업전사’로 불렀다. 땅속에서 괭이질하는 광부들이 땅 위 세상이 바뀌는 걸 알 수가 있나. 점점 연탄 수요가 줄어들자 정부가 1987년 석탄산업합리화산업단(현 한국광해광업공단)을 출범시켰다. 광산이 무더기로 폐업했다. 광부들이 일자리 잃고 지역 경제가 죽으니 여기에 강원랜드가 들어왔다. 막장에서 벗어나나 했다가 실직하고 도박하고 고향 떠난 사람이 많다. 폐광 광부 고용 승계를 약속했는데 청소 용역으로나 몇 십 명 일했을 거다. 그 과정을 다 지켜보며 여태껏 일했다.”

―앞으로 광부들의 열악한 작업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감시자 역할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4차 산업혁명 시대라던데 1982년 처음 출근한 날이나, 40년 지난 오늘이나 광물 채광하는 방식이 하나도 변한 게 없다. 사양산업이다 보니 투자가 이뤄지지 않는다. 적은 인원으로 이윤을 뽑아내는 구조다. 광물 1t 생산 원가와 수입 원가 비교하면 사다 쓰는 게 낫다. 채산성이 맞아야 사람도 더 고용하고 시설도 투자하고 할 텐데…. 안전 비용은 말할 것도 없다. 폐갱도에 갖다 버린 슬러지가 흘러나온 이번 사고만 해도 갱도 입구를 이중 삼중으로 막았으면 예방할 수 있었다. 철제H빔을 딱 하나만 쓰니까 위에서 쏟아지고, 옆에서 밀려나오니 못 버틴다. 힘들어도 언론 인터뷰를 하는 것은 광산의 취약한 부분을 알리고 싶어서다. 평소라면 광부의 삶에 누가 관심이 있겠나. 회사와 대화 창구도 만들고 싶다. 옛날 방식은 안 된다는 경각심이 있어야 한다. 미약하나마 광부들의 안전에 힘을 보태는 것, 그게 살아 돌아온 이유 같다.”

―올 8월에도 봉화 광산에선 붕괴 사고가 있었고 광부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도 안전 점검을 나온 공무원이 “흙탕물도 묻히지 않고 돌아갔다”고 했다.

“사고 이후 우리 큰애가 현장에 입갱했었다. 아내 앞에서 ‘이런 데서 아버지가 평생 일하셨냐’ 하고 꺼이꺼이 통곡을 했다고 한다. 광산안전사무소에서 안전 점검을 나오는데 흙이 묻어 더러워질까 봐 흉내만 내는 것처럼 보였다. 안전점검이라면 흔들어도 보고, 두드려도 보고 닫힌 갱도도 들어 가봐야 하지 않나. 회사야 당연히 돈을 아끼려 할 테고 이를 감시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 아닌가. 공무원의 가족이 일한다고 해도 서류만 챙겼을까 싶다.”

그는 11일 병원을 나서며 “즐겁게 제2의 인생을 살겠다”고 했다. 하지만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어둠을 견디기 힘들다고 했다. 신체는 많이 회복됐는데 심리적 외상이 남았다.

―집에 돌아오신 후 건강은 어떠신가.

“근육이 소실돼서 바지가 헐렁헐렁해졌을 뿐 신체적 건강은 거의 회복됐다. 다만 어두워지면 방에 불을 전부 켜 놓게 되고, 밖에 나가기가 무섭다. 다시는 컴컴한 갱도로는 못 돌아갈 것 같다. 의사가 권한 대로 사람들 만나서 대화하고, 활동하려고 노력한다. 급성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질 수도 있다고 해서 꾸준히 심리 치료를 받을 계획이다.”

―정말 살아있구나 느끼신 순간은 언제인가.

“아내가 끓여준 청국장 먹을 때, 내가 살아 있다고 느낀다. 오늘은 힘내라고 아침부터 소고기 불고기를 해줬다. 큰애는 회사도 휴직하고 옆에 와 있고, 가족들이 애틋한 마음에 자주 모이게 됐다. 살아남은 게 감사한 순간들이다. 새로 얻은 삶은 가족과 동료를 위해 살고 싶다.”

정선=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