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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밤, 베를린의 밤[안드레스 솔라노 한국 블로그]

입력 | 2022-11-25 03:00:00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안드레스 솔라노 콜롬비아 출신 소설가


예전 우리 집은 그 일이 일어났던 골목으로부터 5분 거리에 있었다. 지금은 20분 정도 떨어진 곳에서 살지만, 여전히 그 부근을 자주 지난다. 이태원은 우리 동네다. 이곳으로 이사 온 지 벌써 9년이 훌쩍 지났고, 그렇기에 서울에서 산 시간도 9년이 넘었다. 내가 나고 자란 보고타를 제외하고, 내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을 보낸 곳이다. 내가 쓴 일곱 권의 책 중 세 권에 ‘이태원’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그 비극이 일어났던 전날 밤,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거리가 훤히 보이는 건물의 한 공간에서 외국에서 온 디제이의 공연을 봤었다. 공연이 끝난 후에는 친구들과 마마킴이라고 불리는 술집에 갔다. 술집의 진짜 이름은 ‘그랜드 올 오프리(Grand Ole Opry)’. 이태원이 겪은 격동의 시간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남아 영업 중인 가게로, 1973년 미국인과 결혼한 한국인이 처음 문을 열었다. 예전에 그곳은 용산 기지에서 주둔하던 미군들이 주 고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소위 ‘힙스터’라고 불리는 젊은이들과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 곳이 되었다.

과거 이태원이라는 이름은 ‘위험’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싸움, 매춘, 마약, 강력범죄. 하지만 동시에 어떤 사람들에게 이태원은 자유와 공존을 누리는 곳이었다. 이태원은 머리를 짧게 깎고 바지를 입은 여자들과 요란한 장신구를 걸친 남자들도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었다. 시끄러운 술집들 옆에는 할랄식 정육점이 자리하고 전 세계 대륙에서 모인 사람들이 한국어를 구사하며 여전히 이웃으로 함께 사는 곳이다. 이태원은 지리적 공간을 넘어 정신적인 공간이 되었다. 이민자가 별로 없고 사회적 제약이 많은 나라에 필요한 실험실 같은 것이다. 그런 이유로 서울에서 출생하지 않은 타지인들이 이태원으로 모인다.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 매료된 젊은 외국인 관광객에게도 이태원은 한 번쯤 가 봐야 할 장소가 되었다.

나의 아내는 나보다 더 오래 이태원에 살았다. 2007년에 경리단 인근으로 처음 이사했다. 15년이 지나는 동안 경리단길과 해방촌과 이태원과 한남동은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문화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나의 아내는 이태원이 다시 예전처럼 외부인들에게 위험천만한 곳으로 인식될까 봐 걱정된다고 했다. 그러다가 지난 시간이 켜켜이 쌓인 이 동네의 개성 있는 가게들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다른 시내들처럼 대기업 프랜차이즈가 마구 들어선 무채색의 동네가 되는 건 아닐까 우려했다.

아내의 친구들은 2000년대 초반 힙합 스타일의 옷을 사기 위해 이태원을 자주 찾았다. 그때도 밤에는 이태원에 자주 가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에게 이태원은 한국에서 하지 못했던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인도 사람들이 가는 인도 식당에 처음 가서 맛있는 인도 커리를 맛본 곳도 이태원이었다. 그 인도 식당은 얼마 전 참사가 일어났던 골목의 끄트머리에 있었다. 주말마다 같은 골목에 있던 작은 클럽에 가곤 했다. 나이트클럽과는 다르게 귀찮게 하는 웨이터도, 술을 억지로 권하는 사람도 없이 그저 음악을 들으면서 춤을 추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아내는 ‘밤 문화’를 발견했고, 음주와 유흥을 넘어 훨씬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2002년, 베를린 클럽 커미션을 만든 독일의 루츠 라이센링처럼 말이다.

독일의 경우, 밤 문화를 선도하는 댄스 클럽이 창출하는 수입은 매년 17억 달러(약 2조 원)이다. 하지만 이 클럽들이 가지는 더 중요한 가치는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다양한 방식의 삶이 만나는 지점이라는 부분이다. 베를린의 밤 문화는 작은 댄스 클럽들의 유기성을 기반으로 구축되었다. 예전만 하더라도 베를린의 클럽들은 임시 공간을 활용했었고 건물주들은 클럽이 있던 곳들을 허물고 쇼핑몰이나 호텔과 같은 대형 시설을 지어야 관광객이 모인다고 믿었다. 하지만 20여 년 전부터 분위기가 바뀌었다. 젊고 창조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유행의 선구자들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똑같은 쇼핑몰은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를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박물관이나 갤러리에 관심을 가지고 투자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클럽과 밤 문화를 바라보고 개발했기에 이후 베를린이 세계 클럽 문화의 중심지로 알려질 수 있었다.

이후 유럽의 다른 도시들도 밤 문화를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내어 지원하고 보존하기 시작했다. 런던, 암스테르담, 프라하에서 ‘야시장제(Night Mayor·나이트 메이어)’라는 제도를 도입하여 밤 문화와 관련 경제를 관리하는 것이다. 나는 한국에서 살면서 한국이야말로 24시간 돌아가는 곳으로 밤 문화가 활성화되어 있는데, 클럽과 같은 곳들도 이제는 음지가 아닌 양지에서 관리되고 지원되어 문화 효과와 경제 효과를 함께 누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안드레스 솔라노 콜롬비아 출신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