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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최인아]단기적으론 비관하더라도 장기적으론 긍정하기!

입력 | 2022-11-26 03:00:00

앞세대 분투 덕분에 더 나은 세상 열려
시간의 힘 믿고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면
후배들은 한층 개선된 환경에서 일할 것



최인아 객원논설위원·최인아책방 대표


올해 가을은 꽤나 길다. 11월 말인데도 낮 기온이 14, 15도를 오르내린다. 지구온난화가 걱정되지만 솔직히 좋기도 하다. 가을은 늘 잠깐 얼굴을 보여주곤 바로 내빼는 ‘나쁜 연인’처럼 짧아서 아쉬움이 컸다. 만약 계절을 골라 태어날 수 있다면 가을을 택할 만큼 나는 이 계절을 좋아하는데 작년 이후로 가을은 내게 잊기 어려운 역사가 되었다. 이맘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1929년생으로 90년을 넘겨 사셨는데 나는 돌아가시고 나서야 아버지의 생애를 가늠해 보았다. 조선은 이미 망하고 대한민국은 아직 태어나기 전, 그러니까 그는 식민지 백성으로 생을 시작했다. 사춘기 소년이 되었을 때 광복을 맞아 기 좀 펴나 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6·25전쟁이 터졌다. 행운의 여신이 함께하지 않았더라면 포연 자욱한 전장에서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행히 그는 전쟁 통에도 목숨을 부지했다. 하지만 가난은 떨어지지 않는 진흙처럼 딱 붙어서 괴롭혔다. 어찌어찌해서 가장이 되고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는 동안 그도, 우리 사회도 온 힘을 다해 앞으로 나아갔고 그의 아이들은 중진국의 아이들로 자랐다. 그러다 눈을 감을 즈음 그의 조국은 선진국에 공식 진입했다. 그는 식민지 백성으로 이 세상에 와 선진국 시민으로 떠났다. 그가 살면서 맞닥뜨렸던 순간순간은 절망이었겠으나 긴 인생을 돌아보면 상승이고 도약이었다.

‘82년생 김지영’이란 소설이 있다. 100만 부가 넘게 팔린 밀리언셀러다. 소설은 주인공이 여성이어서 당한 차별과 피해를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집에선 아빠, 아들, 할머니 순으로 밥을 퍼주었고 학교에선 남학생부터 급식을 먹였으며 대중교통에서 성범죄를 당했을 때 아버지는 피하지 못한 딸의 잘못이라며 2차 가해를 한다. 취업할 땐 여자라서 차별당했고 어렵게 입사한 후엔 회식 자리에서 성희롱을 당한다. 급기야는 결혼과 출산으로 경력이 단절된 후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일 안 하고 남편이 벌어주는 돈으로 편하게 커피나 마시는 맘충’이라는 폭언을 듣는다. 쌓이고 쌓인 분노와 스트레스가 임계치를 넘자 주인공 김지영은 정신건강의학과 치료까지 받는다. 82년 이전에 출생해 이런 일을 먼저 겪은 선배 여성들은 아직도 사회가 이 모양이냐며 목소리를 높였고, 좀 더 젊은 후배들은 여성이어서 겪는 차별과 불운에 격하게 공감하며 성토했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 사회는 아직 여성들에게 불합리한 부분이 많고 유리천장도 여전하지만 84년부터 사회생활을 한 내가 보기엔 꽤 많이 개선됐다고. 아, 오해하지 마시라. 이전보다 나아졌으니 이쯤에서 만족하란 뜻이 아니다. 아직 아쉬운 대목이 많지만 이만큼이나마 여성에 대한 인식과 처우 등이 나아진 것은 앞 세대의 분투와 사회의 노력이 있은 덕이니, 당신도 지금 있는 자리에서 애써 보라는 뜻이다. 우리 후배들이 지금보다 나은 환경에서 일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지금과는 아주 다른 30년 전 과거 모습을 기억하고 또 겪은 나는 우리가 계속 앞으로 나아갔으며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엊그제 한 금융기업에 가 강연을 하고 왔다. 일을 잘한다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였는데, 나는 좋은 성과를 내고 오래도록 성장하고자 한다면 자기 자신을 브랜드로 바라볼 것을 제안했다. 우리가 소비자로 매일 뭔가를 구매하며 브랜드를 따지듯 스스로를 하나의 브랜드로 인식하면 자신만의 가치를 만들어내고 롱런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취지였다.

브랜딩은 시간에 비례해 가치를 축적해 나간다는 발상을 전제로 한다. 단기적으론 가치 하락이나 후퇴가 있더라도 장기적으로 가치 상승을 이루려는 생각 말이다. 성질 급한 우리 한국 사람들은 세상을 비관적으로 인식하기 쉽다. 우리는 뭐든 빨리빨리 되기를 바라지만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고, 또 진행 중에는 이 일이 될지 안 될지 알기 어렵다. 바로 그때 마음에 불안이 파고든다. ‘계속해도 되는 걸까’라는 의심도 함께 자란다. 나는 언젠가 이 지면에 긍정의 힘은 스스로를 믿는 데서 오고 스스로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과거를 믿는 것이라 썼는데, 하나를 더 보태고 싶다. 긍정이란 시간의 힘을 믿는 것이라고. 뭔가를 이루려면 먼저 시간을 들여야 하고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고 기다리는 것. 단기적으론 비관하더라도 장기적으론 추세 상승을 믿는 것이 스스로에게도 이롭지 않을까. 우리는 그렇게 해서 지금 여기까지 왔고 마침내 선진국 시민이 되었으니.




최인아 객원논설위원·최인아책방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