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S도 입은 모던 한복, 황이슬 디자이너
2023 SS 밀라노 패션위크 GFC에서 선보인 리슬의 컬렉션. 리슬 제공
황이슬 대표는 올 9월 한복 브랜드 최초로 밀라노 패션위크 무대에 서기도 했다. ‘포브스’가 ‘전 세계에서 새로운 재능을 뽐내는 디자이너를 위한 무대’라고 소개한 GFC(Global Fashion Collective) 런웨이 위를 12벌의 한복을 입은 모델들이 경쾌한 음악에 맞춰 걸었다. 데님·메시 등 다양한 소재, 과감한 믹스 매치로 구성된 그의 의상은 구중궁궐이 아니라 ‘인싸’들만 모인다는 서울 성수동 거리를 떠올리게 한다. 한복을 입고 인사를 건네는 황 대표 역시 거침없는 성격이었다.
“이렇게 하면 될까요?”
패션 테러리스트요?
옷을 못 입는다고 항상 지적받아 교복이나 체육복만 입고 다녔어요(웃음). 대학에 들어가 한복을 만든 건 우연한 일이었어요. 코스프레 동아리 행사에서 입을 옷이 필요하니까 얼토당토않은 방식으로 어설프게 한복을 지었죠. 드라마 ‘궁’에 나온 퓨전 한복을 따라 만들었어요. 그래도 보기에는 그럴싸해서 사람들 반응이 좋았어요. 그 옷이 중고 시장에서 팔리니, 옷을 계속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온라인 쇼핑몰도 열었고요.
추진력이 대단하네요.
제 장점인 것 같아요. 하나에 되게 꽂히는 게 있으면 엄청 파는 ‘덕후’ 기질이 있어요.
처음 1년간은 거의 없었어요. 옷을 만들어 팔기 시작한 지 2년째가 되니까 감이 오더라고요. 내가 좋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고객이 좋아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고객 피드백을 조금씩 반영하니 반응이 완전 달라졌죠. 월 300만∼400만 원 정도 매출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부모님 눈빛도 달라졌죠. 그래도 “너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뭐 하는 거냐”라는 소리 듣지 않으려고 학점도 열심히 땄어요. 부모님이 이불 집을 하셨거든요. 밤늦게까지 고생하셨으니까 ‘자식은 사업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신 거죠.
타고난 손재주가 있는 거네요.
어깨너머로 부모님이 미싱 돌리는 걸 봤죠. 손재주도 기본적으로 있는 편입니다. 사실 그래서 처음 아무것도 없이 옷을 만들 때도 눈으로 보고서 흉내 낼 수 있었죠. 그래도 저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의류학과 수업도 듣고, 도서관에 가서 책도 찾아보고, 학원도 다녔죠.
“한복의 허들을 낮추고 싶다”
산림 공무원이 되려고 전북대 산림자원학과에 진학했어요. 대학교 3학년 때까지만 해도 사업은 취미 수준이었던 거 같아요. 졸업반이 돼 친구들이 취업 준비하는 걸 보면서 고민했죠. 인생의 3분의 1은 자는 시간이고, 3분의 1은 일하는 시간,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 제가 좋아하는 걸 해야 하는 삶을 그려봤어요. 그러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고 생각했죠. 공무원이 된다 한들 일하면서도 한복 생각을 계속할 것 같았고요. 정말 열심히 하면 제 몸 하나 건사할 수 있겠다는 자신도 있었고요.
그는 공무원 시험을 보는 대신, 숙명여대 의류학과 석사과정에 진학한다. 본격적으로 의상디자이너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힘든 순간도 있었을 텐데요.
2011년 새로 만든 브랜드인 ‘리슬’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미디어의 주목을 받게 됐어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부정적인 평가도 들어야 했죠. “저게 한복이냐” “한복을 망쳐놨다” “일본 옷이다” 같은 거요. 회사로 전화해서 다짜고짜 화내는 경우도 있었어요.
한복에 대한 고정관념이네요.
북촌에 가면 많은 분이 다채로운 디자인의 한복을 입잖아요. 예전에는 이에 대한 의견을 달라는 기자들의 연락을 많이 받았어요. 부정적인 피드백을 기대하는 것 같았는데 사실 저는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했거든요. 이런 방식이든 저런 방식이든 한복을 입는 게 중요하잖아요. 이로 인해서 사람들이 한복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나도 입어보고 싶다’고 생각하면 새로운 출발점이 되는 거죠. 저 역시도 한복의 허들을 낮추는 일을 하고 싶고요.
황 대표는 “처음에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을 때 많이 흔들리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당시엔 저도 제 디자인 세계가 확실하지 않았어요. 이게 전통을 해치는 일인가 고민하기도 했고요. 지금은 아니에요. 전통 한복이 아름답다는 건 알지만 활용하지 않는 게 문제잖아요. 어떻게 해야 일상에서 한복을 입을 수 있는지를 고민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제 생각을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밀라노 패션위크에 선다는 건 디자이너로서 어떤 의미인가요.
가장 빛나는 순간이죠.
초청받았을 때를 기억하나요.
처음에는 너무 좋았지만 바로 부담이 몰려왔어요. 3개월 동안 옷을 만들어서 내야 했는데, 잘못 만들었다가 국제적 망신을 당할까 걱정했어요. 한복에는 한국을 대표한다는 꼬리표가 따라붙잖아요.
한복인 듯 한복 아닌, 한복 같은 옷이었습니다.
2017년에 밀라노 패션 페어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그때부터 한복을 글로벌 무대에서 먹히는 패션 장르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처참히 깨졌어요. 1억 원이 넘는 돈을 써서 200만 원 남짓의 오더를 받았죠. 그때 받은 피드백이 “비즈니스적 시각에서 볼 때 제가 만든 옷이 패셔너블하지 않다”는 거였어요. 역으로 생각하면 우리가 멕시코의 전통의상을 평소에 입지 않잖아요. 이번엔 오리지널 한복을 강조하기보다 21세기 패션으로 활용될 수 있는 한복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밀라노 패션위크에서의 반응은 어땠나요.
우호적이었어요. OFN이라는 패션 미디어 대표는 “Young Tradition(젊은 전통)”이라는 평가를 해줬어요. 패션쇼 연출자도 “전형적인 한복을 떠올렸는데, 정말 웨어러블(착용하기에 적합)하다”고 좋아하셨고요. 그간의 고생이 확 풀리는 거 같았죠. 물론 한국에서는 “우아함은 어디다 갖다 팔아먹었냐”는 이야기도 있지만요(웃음).
K-팝 무대에서 영감받는 한복
(왼쪽 아래)한복과 애슬레저가 결합된 리슬의 컬렉션. 접근성 있고 퀄리티 높은 한복을 만들고 싶다는 황이슬 리슬 대표. 리슬 제공, 지호영 기자
BTS로부터 연락받은 순간을 잊을 수 없을 거 같아요.
갑자기 전화가 와서 BTS 관계자라고 하는데, ‘뻥’이라고 생각했어요. 차마 통화하면서 ‘거짓말이죠?’라고 물을 수는 없었지만 사실 말이 안 되잖아요. 실제로 지민이 무대에 입고 나오는 걸 보는 순간까지 긴가민가했어요. 일이 틀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 일이 진짜로 믿기는 순간, 좋아서 소리를 막 질렀죠.
많은 셀럽, 기업과의 협업을 진행해왔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컬래버가 있나요.
4월 그래미 어워드에 선 걸 그룹 비비지 옷을 만들었던 게 기억에 남아요. 일반적인 무대 의상을 입어도 되는데 한복을 선택해준 거잖아요. 그래미라는 큰 플랫폼을 통해 선보였을 때 수많은 팬이 이를 보고 한복을 더 알게 되지 않을까, 그 관심이 퍼져나가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었죠. 물론 일주일이라는 짧은 기한을 줘서 잊을 수 없기도 하지만요(웃음).
어디서 영감을 받으세요.
저는 진짜 K-팝을 좋아하거든요. 트렌디함의 정점에 있다고 생각해요. 의상, 메이크업, 헤어스타일 등이 하나의 잘 짜인 각본 같아요. 최근에는 힙한 의상에 빠져서인지 YG엔터테인먼트 스타일이 마음에 들더라고요.
리슬의 옷 중에 조선시대 왕의 문양이 새겨진 맨투맨과 후디가 그런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겠네요.
K-팝 무대도 많이 보지만 최근 패션 트렌드도 참고합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애슬레저 룩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잖아요. 이걸 한복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봤죠. 격식을 차리는 옷보다 캐주얼한 옷을 만들어보자. 그래서 룩북도 나이키 느낌으로 찍었어요. 한복을 입고 스포츠 머리끈을 두르고, 스타벅스를 들고 다니는 식이죠.
리슬을 어떤 브랜드로 만들고 싶나요.
한복으로 우주 정복을 하고 싶어요(웃음).
우주 정복이요.
힙하고 멋진 것들 사이에서 한복이 보이게 만드는 거죠. 아직 한복이 하나의 패션 장르로 자리 잡으려면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해요.
전통의상 모티프로 글로벌 패션계에서 자리 잡은 브랜드가 있나요.
치파오 등 중국의 전통의상을 현대화한 상하이탕은 드레스가 1000만 원 가까운 가격에 팔립니다. 저는 그보다는 접근성을 높이고 싶어요. 외국인에게 맵고 짠 한국 음식을 바로 먹으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낮은 단계부터 한복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것까지 폭넓게 작업하려고 합니다.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 선생님, 코코 샤넬 등 존경하는 디자이너가 많지만 저는 토리 버치의 정신이 마음에 들어요. 그는 가성비 높은 명품을 만들고 싶었대요. 너무 비싸지 않으면서 동시에 꼼꼼하게 심혈을 기울여 만든 옷을 선보이겠다는 야심이었죠. 저도 다가가기 어렵지 않지만, 퀄리티는 좋은 한복 브랜드로 인식되면 좋겠어요.
아직도 한복을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아이템을 일상에 접목해볼 수 있을까요.
시작하기엔 셔츠처럼 보이는 저고리가 좋을 것 같아요. 청바지나 면바지 모두에 잘 어울려요. 조금 더 나아간다면 전통 문양이 들어간 옷이나 노리개 같은 액세서리를 매치해보는 거죠.
에미상 시상식에서 댕기 스타일을 했던 정호연 씨가 생각나네요.
아주 좋은 사례죠. 옷은 일반적인 드레스지만 머리에 댕기 하나만 달고도 한국적인 무드를 연출할 수 있어요. 최근 장원영 씨도 봉황 비녀를 머리에 꽂고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행사에 참여했잖아요.
K-문화에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시기를 잘 탔다는 생각도 하시나요.
솔직히 그렇죠(웃음). 그래도 일이라는 건 항상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어서 지금 잘된다고 자만하거나, 안 된다고 슬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출근을 기다린다. 시작한 걸 후회하지 않는다. 가게에 나오면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 100% 내 진심이다.”
그가 8년 전 쓴 책 ‘나는 한복 입고 홍대 간다’ 머리말에 쓴 내용이다. 황 대표는 “지금도 그 말은 100% 진심”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전주 리슬 사옥이 아닌 뉴욕 타임스스퀘어에 그의 얼굴이 걸리는 날도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문영훈 기자 yhmoon9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