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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제주, 숲멍에 빠지다

입력 | 2022-11-28 03:00:00

때 묻지 않은 자연의 건강 에너지…‘머체왓숲길’과 ‘동백동산’




포토존으로 유명한 머체왓숲길 입구 느영나영나무./ 제주관광공사 제공

《제주는 언제 찾아도 좋지만 11월 말의 제주는 특히 더 매력적이다. 나지막한 돌담 사이로 노란 감귤이 익어가고 모슬포 앞바다 거친 파도 속엔 방어가 펄떡인다. 여름 뜨거운 햇볕 아래 초록으로 빛나던 오름은 어느새 황금빛 억새 물결로 뒤덮이고, 곶자왈 깊은 숲에선 한겨울을 날 에너지가 차곡차곡 쌓여간다. 스치는 바람조차 놓치기 아까운 이 계절의 제주, 관광객들 사이에서 조용히 명성을 얻어가고 있는 힐링 포인트를 찾았다.》


 

생사초 비밀 간직한 야생의 숲
머체왓숲길


숲이 주는 여유를 한껏 만끽할 수 있는 머체왓숲길. 박해윤 기자

제주도관광협회에 따르면 11월 9일 기준 올해 제주를 찾은 관광객이 1200만 명을 돌파했다.이렇게 많은 이가 찾는 곳이지만 아직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숨은 보석 같은 곳이 많다. 서중천을 품고 있는 머체왓숲길도 그런 곳 중 하나다. 서중천은 서귀포 남원읍을 관통해 해안으로 흘러간다.

머체왓숲길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킹덤: 아신전’에 소개되며 관광객들보다 방송을 통해 먼저 이름을 알렸다. 어린 아신이 죽은 사람을 살리는 꽃 ‘생사초’를 처음 발견했던 폐사군의 숲과 전지현이 처음 등장해 멧돼지를 잡는 장면을 이곳에서 촬영했다. 머체왓숲길은 1코스 머체왓숲길, 2코스 소롱콧길, 3코스 서중천탐방로 등 3개의 숲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현재 개방한 곳은 머체왓숲길(6.7km·2시간 30분 소요)과 소롱콧길(6.3km·2시간 소요) 두 군데다. 머체왓은 돌이 많은 밭, 소롱콧은 지형이 작은 용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가운데 이곳 안내센터 직원의 추천으로 소롱콧길 코스를 택해 직접 걸어봤다. 소롱콧엔 사이좋은 용 형제가 화산이 폭발한 줄도 모르고 신나게 이야기를 주고받다 그대로 용암에 뒤덮여 돌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박해윤 기자

소롱콧길 입구에 들어서면 드넓은 평원과 한라산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나무,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영화 같은 장면과 마주한다. 평원에서 몇 발짝만 내디디면 소롱콧의 야생 숲길이 이어진다. 뿌리를 땅으로 드러내고 어지럽게 줄기를 늘어뜨린 나무와 생사초의 모티프가 되었을 법한 들풀, 이끼, 고사리가 지천이다. 원시의 생명력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발걸음을 내딛느라 눈이 바쁘고, 숲을 가득 채우는 이름 모를 새소리에 귀가 즐겁다. 소롱콧에서는 조록나무 군락, 꾸지뽕나무 등 다양한 수목을 만날 수 있지만 그중 으뜸은 편백나무와 삼나무 군락이다. 한눈팔지 않고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모습에 경외감이 들 정도다. 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를 들이마시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머리가 맑아지고 마음까지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코스 곳곳에 벤치와 쉼터가 마련돼 있어 숲멍을 하기도 좋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 보면 숲이 나와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든다.

소롱콧길 막바지에 있는 서중천 전망대는 큰 현무암과 기암절벽이 어우러진 서중천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포인트다. 하천을 감싸고 있는 암석들이 마치 용의 뼈대처럼 웅장하다.

길이 잘 다듬어지지는 않았으나 그 맛에 머체왓숲길을 찾는 사람도 많다. 머체왓숲길 입구에 있는 안내센터와 카페에서는 숲 해설과 편백족욕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주소 |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서성로 755


다양한 동식물 생명 에너지 가득
동백동산


동백동산에선 운 좋으면 노루도 만날 수 있다. 박해윤 기자

발바닥에 닿는 흙의 느낌이 폭신하다. 한낮인데도 나무가 터널처럼 이어져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현무암에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나무에선 강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제주 동쪽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동백동산 곶자왈의 첫인상이다. 곶자왈은 10만 년 전 화산이 분출할 때 점성 높은 용암이 크고 작은 바위 덩어리로 쪼개지면서 요철 지형으로 형성된 곳이다. ‘곶’은 제주 말로 ‘숲’을, ‘자왈’은 ‘가시덤불’을 의미한다. 용암이 굳은 직후에는 아무것도 없던 불모지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풀과 나무가 자라고, 여러 곤충과 동물이 모여들어 독특한 생태계를 이루었다.

이곳이 동백동산이란 명칭을 갖게 된 건, 이름 그대로 동백나무가 많기 때문이다. 오래전 주민들은 이곳에서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썼는데, 기름을 짜서 내다 팔 수 있는 동백나무는 남겨두었다. 덕분에 동백나무 10만여 그루가 군락을 이루게 됐으며 이외에도 구실잣밤나무, 종가시나무, 후박나무, 빗죽이나무 등 다양한 수목이 서식한다. 동백나무는 숲에서 햇빛을 보기 위해 하늘로 높게 자라, 개화 시기가 되면 하늘에서 동백이 피는 장관이 연출된다고 한다. 개량 동백은 제주 곳곳에서 이미 많은 꽃을 피웠으나 동백동산의 토종 동백은 이제 막 꽃망울을 맺기 시작해 내년 2월에 만개한다.

동백동산은 1971년 일찌감치 제주도 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된 덕분에 중산간 어느 지역보다 곶자왈의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었다. 다양한 수종 외에 함몰지, 동굴 등 지형적 특성 때문에 멸종위기종인 제주고사리삼과 가는쇠고사리, 홍지네고사리 등 양치식물을 비롯한 희귀 동식물이 서식한다.

울창한 나무 터널을 한참 걷다 보면 시야가 확 트이는 평지가 나오는데, 이곳이 먼물깍이다. ‘먼물’과 끄트머리를 이르는 제주어 ‘깍’이 합쳐진 이름으로,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물이라는 뜻이다. 먼물깍은 용암이 흘러내리면서 오목하게 굳은 곳에 형성된 습지로, 2011년 람사르 습지로 지정됐다. 동백동산 출구 쪽엔 ‘새로판물’이라는 작은 습지도 있다. 주민들이 우마(牛馬)용으로 이용하기 위해 흙을 파내고 돌담을 쌓아 만든 작은 저수지인데, 주변 동물들의 식수원이 되어준다. 이곳에선 운이 좋으면 노루를 만날 수 있는데, 실제 기자와 마주친 노루는 사람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동백동산을 자유로이 누비고 다녔다. 인간이 이곳에 서식하는 동물들에게 더 이상 위해가 되지 않을 만큼 생태가 잘 보존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탐방객들이 지금의 동백동산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데는 이곳을 묵묵히 지켜온 선흘리 주민들의 공이 크다.

동백동산 탐방 코스는 약 5km에 걸쳐 있다. 동네 앞동산이라고 하기에는 서운할 정도로 숲이 울창하지만 대부분 평지라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다. 탐방 소요 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로, 반드시 운동화나 등산화를 신어야 한다. 동백동산습지센터에서는 다양한 생태관광 및 환경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동백동산 입구 선흘리 마을 풍경도 그냥 지나치기엔 아까울 정도로 정겹다. 낮은 돌담이며 감귤밭, 단정하게 가꾼 집과 마을이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풍경 같다.

주소 | 제주도 조천읍 선흘리 산12

 

김명희 기자 mayh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