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릿속에 으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패러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놓소. 가증할 상식의 병이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 작가 이상(李霜)의 단편 ‘날개’(1936년) 첫 문단과 마지막 문단
박제를 프랑스어로 ‘Empaillage’라고 하는데요, 의자나 베개 등에 솜이나 짚을 채워넣는 걸 의미합니다. 반면 동아시아권의 ‘박제(剝製)’에서 ‘剝’은 가죽을 벗긴다는 뜻입니다. 물론 동물 사체에서 가죽을 벗기고 썩지 않도록 속을 다른 물질로 채우는 과정은 같지만, 서양권에서는 ‘채운다’는 데 의미를 더 부여하는데 비해 동아시아권은 ‘벗긴다’는 데 더 의미를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서양권에서의 박제는 생명의 의미가 강합니다. 고대 이집트에선 영생을 희망하며 미라로 만들었고요. 반면 동양권에선 죽음의 의미가 좀 더 강하게 느껴집니다. ‘Empaillage’에선 생명(솜)이, ‘剝製’에선 죽음(칼)의 이미지가 그려집니다.
‘화석’이란 단어도 박제와 비슷하게 쓰이죠. 좀처럼 변하지 않고 옛 것을 지루하게 고수하는 사람이나 집단을 ‘화석으로 박제됐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살아있는 화석’이란 대칭적 표현에서 보듯 오래도록 버틴 생명성이 강조되기도 합니다.
2021년 8월
화석·박제 모두 이중적입니다. 정지돼 있지만 가장 역동적입니다. 호랑이 박제는 포효하고 있고 백조 박제는 힘찬 날개 짓을 합니다. 공룡 뼈 화석은 다시 맞춰져 서 있습니다. 죽었지만 살아있지요. 고대 화석은 과거를 세워 현재를 보여줍니다. 시간을 뛰어 넘었죠. 박물관에서 박제나 화석을 보고 있으면, 내 자신이 박제돼 있고 이들이 살아 움직이는 게 아닐까 하는 판타지에 빠지기도 합니다. 살아있는 모습 그대로이니 이미 부활한 것 아닐까요?
박제사의 작업 과정을 직접 본 적이 있습니다. 솜과 칼의 예술이더군요. 칼(빼기)과 솜(더하기)의 균형을 맞춰 영원불멸의 작품을 창작한다고 느꼈습니다. 살과 내장은 버린 뒤 가죽만을 남기고, 이 생물의 가장 멋진 모습이 되도록 채워 넣는 과정.
2020년 1월
시간은 순간순간 이미 지나가고 있으니 끊임없이 죽음을 양산합니다. 사진가는 소멸해가는 한 순간을 가장 사실적으로 잡아 영원불멸을 창작하고자 욕망합니다.
카메라에도 ‘솜’과 ‘칼’이 있습니다. 제한된 시간과 공간을 선택하는 것은 칼의 행위죠. 필요한 부분만 잘라내야 하니까요. 그리고 그것에 ‘솜’(내용)을 채워 넣습니다. 이 순간이 박제돼 영원으로 남는 것이죠. 사진은 순간과 공간을 멈춰 세움과 동시에 생명을 채워 넣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진가는 순간과 공간을 지배하고픈 권력욕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해야 합니다. 순간과 공간에 자신이 질서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은 착각입니다. 질서라는 이름으로 과도한 왜곡을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자칫 그 순간과 공간을 두 번 죽입니다. 칼은 잘 못 쓰면 허무하고, 솜을 잘 못 채우면 어수선한 사진이 됩니다.
▽우리는 모두 사진가입니다. 모두가 박제사들입니다. ‘전화기 기능이 있는 카메라’를 다 들고 계시잖아요.
멋진 곳을 방문하면 사진을 찍죠. “남는 건 사진뿐이야”라면서요. 기록의 행위입니다. 추억을 박제하고 기억을 화석으로 남기는 행위. 다만, 그 순간을 영원히 빠짐없이 모두 살려두고 싶다면? 지나친 욕망입니다. 다 살릴 수는 없죠. 기록의 가치가 없는 것은 칼을 휘둘러 과감히 빼야 합니다. 칼은 때론 방패가 됩니다. 다른 것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칼질은 적게 하고 솜만 잔뜩 넣는 분들도 있죠. 모든 것을 기록하고픈 바람 때문입니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너무 어수선하고 질서가 너무 없는 사진이 되고 맙니다. 정리 안 된 역사의 너절한 기록은 역사가 아니듯, 선택 없는 사진은 사진이 아닙니다. 그냥 촬영한 것에 불과합니다. 모든 것을 다 살리려다보면 모두를 다 죽이게 됩니다. 그냥 촬영해 기록하는 것은 CCTV와 블랙박스가 더 잘합니다. 과감하게 한 두가지 주제만 정하고, 그 주제가 잘 부각되도록 앵글을 잡아야 사진이 비움과 채움의 예술이 되지 않을까요?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