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이후 양로원을 세우겠다는 꿈을 향해 13년 동안 달려와 마침내 결실을 맺은 정은심 원장.
2006년 10월. 20세 꽃다운 나이의 정은심은 가냘픈 어깨 위에 너무나 무거운 짐을 메고 한국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북한에 남은 어머니와 여동생,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까지 다 데려오려면 큰 돈이 필요했다. 당시 한 명을 한국으로 데려오려면 600만 원이 필요했다.
서울 노원구에 정착한 그는 한국 사회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어느 횟집에 종업원으로 취직했다. 그때부터 새벽에 일어나 밤 10시에 들어오는 생활이 반복됐다. 식당에선 아침 10시부터 저녁 10시까지 12시간 일해야 했지만, 컴퓨터학원과 운전학원까지 다니다보니 새벽에 일어나 5시에는 나가야 했다.
그가 받은 월급은 120만 원. 한 푼도 안 쓰고 모아도 어머니와 여동생을 데려오려면 1년은 벌어야 했다. 쉬는 날에는 다른 곳에 가서 알바로 일했다. 그걸 보고 횟집 사장이 “다른데 가서 일할 바에는 쉬는 날에도 식당에 출근하면 추가 수당을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한 달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식당에서 일했다.
탈북민 관련 기사가 인터넷에 뜨면 흔히 “가족을 버리고 온 사람들”이라는 악플이 달린다. 탈북민에겐 가장 아픈 말이다. 사실 알고 보면 대다수 탈북민이야 말로 가족을 위해 목숨까지 내건 사람들이다.
탈북했다 체포돼 북송되면 목숨을 장담하기 어렵다. 가족이 함께 움직이면 더욱 위험하고, 비용도 엄청나게 들 수밖에 없다. 가족이 함께 탈북했다가 북송되면 “온 가족이 조국을 버리고 도망쳤다”며 꼼짝 못하고 정치범이 되기 쉽다.
반면 가족 중 한 명이 탈북하면, 실패해 북송이 된다고 해도 북한에 남은 가족이 구명운동을 펼 수 있고, 최악의 경우 본인만 처벌 받으면 그만이다.
그래서 보통 일가가 탈북하기 전에 그 가족 중에서 가장 젊고 용감한 사람이 먼저 탈북해 기약 없는 중국 땅에서 탈북 통로를 개척한다. 그가 성공해 한국에 오면 이후 돈을 벌어 북한 가족을 데려오는 것이다.
은심도 이러한 운명을 몸으로 떠안았다. 한국에 온 그의 머리 속에는 오직 가족을 데려올 생각 밖에 없었다. 하도 열심히 일하는 그를 유심히 살펴보던 김소영이라는 언니가 어느 날 그를 찾았다.
“내가 10년 다니던 회사에서 퇴직해 퇴직금을 받게 되는데 그중 10분의 1을 십일조로 내려 했어. 그런데 그것보다는 사람을 살리는 게 더 낫다 싶어 그 돈을 줄 테니 가족을 데려와.”
은심은 고마워 며칠을 펑펑 울었다.
그 돈으로 그는 이듬해 어머니와 여동생을 데려올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뒤 외가 식구들은 모두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는 비보를 전해 들었다.
양로원에 입소한 어르신들의 수발을 하는 정은심 원장.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간 외가 친척들
손녀에게서 돈을 받은 외할아버지는 주거지인 양강도 혜산으로 돌아가 온 가족을 탈북시킬 준비를 했다. 북한 다른 곳에 살던 아들과 딸들에게 연락해 외손자들을 먼저 혜산으로 보내게 했다.
외할아버지는 북한에서 몰래 신앙의 믿음을 지켜가던 지하교인이었다. 한국에서 기독교 신자의 집안에서 태어난 외할아버지는 어릴 적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살았다. 그곳에서 성장해 가족을 꾸리고 살다가 1950년대 대기근을 피해 자식들을 데리고 북한으로 건너왔다. 북한에 넘어와서도 몰래 성경책을 구해 신앙생활을 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전도했다.
외손녀의 탈북을 계기로 더는 북한에서 살고 싶지 않았던 그는 외손자 3명과 자신이 전도했던 사람의 자식 3명을 모아 집에 데리고 있다가 브로커를 시켜 먼저 중국으로 탈북시켰다. 아이들을 먼저 보내고 어른들도 뒤따라 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동네에서 놀던 아이들이 어느 날 6명이나 사라지자 보위부가 집중 감시를 했고 어른들은 탈북하기 전에 모두 체포됐다. 보위부에선 외할아버지가 기독교인으로 주변에 전도했던 사실, 외할아버지의 딸인 은심의 어머니와 그의 자식 2명이 이미 한국에 간 사실을 밝혀냈다.
이 사건으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외삼촌과 외숙모, 이모 등이 체포돼 모두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고 이후 영영 소식이 끊겼다. 은심은 졸지에 외가를 모두 잃었다.
외할아버지가 탈출시킨 아이 6명은 모두 한국에 무사히 도착했다. 이젠 20대~30대인 그들은 여러 지역에서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외가의 비보에 은심은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갔다. 1년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하고 버텼는데 육체적 한계를 느낀 것이다. 병원에선 급성심부전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한달 넘게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그는 간호사라는 직업을 간접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사람을 살리는 그 직업에 매력을 느꼈다.
2018년 봄 안산시 단원구 보건소에 재직 중이던 시절 산책길에 나선 정은심 원장.
탈북길에 오른 여대생
2008년 3월 은심은 간호조무사학원에 등록했다. 탈북하기 전 그는 함흥제1교원대학 유아교육과 2학년 학생이었다. 한국에 와서도 유아교육을 공부할까 싶은 생각이 있었지만, 간호사라는 직업이 더 끌렸다.
1986년 강원도 원산에서 태어난 은심은 1990년대 중반의 ‘고난의 행군’ 기간에조차 배고픈 걱정 없이 살았다.
원산교원대학 음악교원이었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태어나 살다가 어릴 적 북한으로 귀국했다. 그래서 중국에 가족들이 꽤 있었는데, 중국에 남은 형제 중엔 사업으로 성공한 사람도 여럿 있었다.
아버지는 일찍 중국을 드나들며 장사를 했다. 중국에서 땅콩이나 옷 등을 싣고 와 원산에 팔았다. 특히 중국제 구충제가 인기가 높았는데, 이걸 싣고 오는 날이면 원산에 살던 일본 출신 귀국자들이 은심의 집에 와서 줄을 서서 사갈 정도였다.
고난의 행군 시기 은심이 살던 교원아파트엔 먹지 못해 온 몸이 퉁퉁 부어가는 교원들이 늘어났다. 은심의 어머니는 이웃들이 불쌍해 먹을 것을 나눠주었는데 그때마다 아버지는 “제발 잘 사는 척하지 말고 우리도 배고프게 사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던 아버지가 1998년 어느 날 사라졌다. 삼촌들이 정치적 발언을 잘못해 끌려갔는데 본인에게도 추궁이 돌아오자 중국으로 탈출한 것이다.
아버지가 실종되자 주변에서 따가운 눈초리가 날아왔다. 더는 교원아파트에서 살 수없게 됐다. 엄마는 은심과 여동생을 데리고 외가가 있는 혜산으로 이사했다. 중국에 간 아버지에게선 초기 1~2년 동안 연락도 오고 물자도 왔는데 이후 소식이 끊겼다.
아버지가 실종되자 은심의 어머니는 장마당에서 장사를 해 두 딸을 키우다가 은심이 함흥교원대학에 입학한 것을 계기로 아예 함흥으로 옮겨와 살았다.
대도시로 나온 은심은 동창들과 어울리면서 ‘천국의 계단’등 당시 돌아가던 한국 드라마를 수없이 보며 한국에 대한 동경을 키웠다.
김혜연의 ‘서울 평양 반나절’이란 노래를 들으면서 남조선은 참으로 가까운데 왜 갈 수 없을까 생각도 했다. 중국에 친척도 많은데 그까짓 반나절 거리 한국에 얼마든지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계속 자라났다.
그러다 어느 날 중국으로 가는 선이 생기자 미래가 불투명한 북한 땅을 떠났다. 중국에 있는 친척들 덕분에 3국까지 수월하게 왔다. 전염병이 도는 3국 감옥에서 4개월 동안 수감돼 생전 처음으로 큰 고생을 했지만 그것도 이겨냈다. 그렇게 도착한 한국에서 그는 가족을 위해 인생 처음으로 온몸이 부셔져라 일을 해야 했다.
2021년 초 단원구 보건소 시절 코로나 방역에 나선 정은심 원장.
양로원을 창업하다
1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살았던 생활은 간호조무학원에 입학해서도 이어졌다. 그는 단 한번의 결석과 지각도 없이 학원 생활을 마쳤다.
학원 기간 실습을 나가 환자들을 만나보니 간호원이란 직업이 너무나 적성이 잘 맞았다. 특히 양로원에서 노인들과 만나 살아온 과거를 들어주며 어울릴 때가 가장 마음이 편안했다.
22살 은심은 “어르신들을 돌보는 일이 내겐 너무 잘 맞는구나. 앞으로 이 일을 쭉 하며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학원을 졸업한 뒤 그는 한 피부성형외과 병원에 취직했다. 병원 일은 적성에 맞고 재미도 있었다. 하지만 점점 1년제 교육과정을 이수한 간호조무사와 4년제 대학을 나온 간호사와의 격차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열심히 준비해 2012년 단국대 천안캠퍼스 간호학과에 입학했고 2016년 졸업했다. 대학을 다니는 기간 결혼을 했고, 졸업과 동시에 아들도 낳았다.
2년 정도 육아 기간을 마친 뒤 2018년 3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보건소에 보건진료 공무직으로 취직했다. 이곳에서도 그는 치매안심센터에 근무하면서 노인들과 어울렸다. 일을 하면 할수록 급속한 고령화를 맞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노인 돌봄 체계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는 오랜 꿈이었던 요양원을 지난해에 개업했다.
사실 지난 13년 동안 그의 한국에서의 삶은 요양원 개업을 위한 오랜 준비 기간이었다. 그는 간호조무사를 할 때부터 언젠가는 요양원을 열겠다는 생각으로 돈을 악착같이 모았다. 대학을 다니면서도 쉬지 않고 알바를 했고, 보건소에서 받은 월급을 꼬박꼬박 모았다.
요양원은 자기 건물이 있어야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노인들을 위한 재가센터나 주간보호센터는 월세나 전세 건물에서도 운영할 수 있지만 요양원은 반드시 원장이 해당 건물을 소유해야 하는 것이다. 입소자들의 안정적 생활을 위해 필요한 제도이지만, 아무 재산도 없이 이 땅에 정착한 은심에겐 가장 넘기 어려운 산이었다.
다행히 2019년 안산에 2억을 주고 샀던 개인 명의의 집이 2년 뒤 2억6000만 원으로 오르자 그걸 팔아 안산에 실평 66평짜리 건물을 계약했고, 14인실 규모의 양로원을 오픈했다.
집을 계약한 뒤에도 각종 규정에 맞춰 침대와 치료설비 등을 사느라 억대의 돈이 들었는데, 이때엔 어머니가 10년 넘게 꼬박꼬박 모았던 돈을 내놓았다.
모녀가 힘을 합쳐 개업한 양로원에 은심은 좋은 일들이 다 온다는 의미의 ‘다온양로원’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다온양로원 옥상에서 어르신들을 위한 공연을 진행하고 있는 정은심 원장.
탈북민 전용 요양원의 꿈
양로원을 열었지만 성공적으로 자리 잡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처음 문을 열고 50일 동안엔 입소한 노인이 단 1명에 불과했다. 양로원은 간호조무사, 사회복지사, 요양보호사 등을 반드시 고용해야 한다. 이들의 월급에 더해 관리비도 만만치 않게 들었다.
괜히 시작했나 낙심해 잠을 이루는 날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아침이면 그는 어김없이 집을 나섰다. 경로당, 노인대학, 노인식당을 수시로 찾아가는 것은 물론, 직접 자전거를 타고 근처의 모든 아파트 단지들을 다 돌며 전단지를 붙였다. 얼굴이 까무잡잡하게 변하고 몸살로 수시로 쓰러졌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런 노력 끝에 입소한 노인이 작년 12월엔 6명으로 늘어났고 지금은 19명이 입소해 있다. 장차 요양원을 100명 규모로 키우는 것이 은심의 목표다.
하지만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있다.
“제가 요양원을 열 때 탈북 어르신들을 위한 요양원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아직 한 명도 없어서 안타까워요.”
탈북민 복지 문제는 사실 정부의 오래된 고민이다. 지난 3개월 사이에도 생활고에 시달리던 탈북민이 매달 변사체로 발견됐다. 현재 한국에 입국해 사는 탈북민은 약 3만5000명에 이른다. 그런데 이중 가장 생활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노인이다.
40세 이전에만 입국해도 한국에서 직업을 잡아 돈을 벌 수 있지만, 50세가 지나 한국에 오면 일자리도 없어 막막하다. 한국 사회에 대해 좀 알만하면 60세가 넘으니 기초생활수급자 신세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이다. 가족이 없이 홀로 온 노인 탈북민도 많아 쓸쓸하게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많다.
은심의 꿈은 이런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탈북 노인들을 위한 요양원을 만드는 것이다.
“저는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능력이 있어요. 어제 들었던 말을 오늘 또 들어도 저는 좋아요. 특히 북에서 살다 왔기에 탈북민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누구보다 잘 들어줄 수 있어요. 그리고 탈북 어르신들이 고향 음식을 먹고 싶다고 하면 다양한 북한 음식을 만들어 대접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현재 많은 탈북 노인들은 요양원에 어떻게 입소 신청을 하는지도 모르고 지내는 것이 현실이다. 기초생활수급자의 경우 시설등급을 받으면 본인 부담금이 없이 요양원에 입소할 수 있는데, 은심이 만나본 탈북 노인들은 그런 사실도 모를뿐더러 서류를 어떻게 작성하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저부터 잘 자리 잡으면 고향 분들 많이 모셔올 겁니다. 그러자면 다온요양원이 최고라는 소문이 나야겠죠.”
그런 평판을 만들기 위해 은심은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 올해 8월 요양원 윗층이 매물로 나오자 그는 지체 없이 구입해 29인실로 요양원을 늘였다. 간호조무사와 요양보호사도 규정보다 2명 더 고용해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애쓴다.
코로나 시국에 활동이 제약되자 그는 옥상에 넓은 공연 공간과 테라스를 만들어 연주회 등 각종 행사를 열기도 했다.
은심의 노력이 앞으로 어떤 결실을 맺을지는 아직은 알 수 없다. 사회의 고령화 속도와 비례해 전국에 각종 노인복지 시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양로원도 모두가 유지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36세의 양로원 원장 정은심의 도전이 이제 시작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직 그는 너무 젊다. 달려갈 길이 멀지만, 반대로 달릴 힘도 충분히 남아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무수한 고난의 언덕을 포기하지 않고 넘고 또 넘어간다면, 그의 꿈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게 될 것이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