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 차학경 모습, 동아일보 DB
올 1월 뉴욕타임스가 사망 40년 만에 ‘뒤늦은 부고’를 내놨다. 부고의 주인은 한국계 미국인 예술가 차학경(1951~1982). 그의 2001년 미국 버클리미술관 기획순회전 도록 ‘관객의 꿈: 차학경 1951-1982’(2003년)를 번역해 국내에 처음으로 차학경 전작을 알린 김현주 추계예술대 미술대 교수는 “지금 차학경? 왜?”라는 의문을 가졌다고 했다.
18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만난 김 교수는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지금, 아시안 아메리칸 여성으로서의 자전적 내용이 독창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공감대를 얻었다”고 답을 내렸다. 부산 출생인 차학경은 12살 때 하와이로 간 뒤 미국으로 이주했다. 요절한 탓에 작품은 50여점에 그치지만 비디오, 퍼포먼스, 아트북 등 그의 작품은 이민자와 여성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사유가 두루 담겼다.
일례로 차학경의 미완성 유작 ‘몽고에서 온 하얀 먼지’(1980년)는 만주로 망명한 실어증 여성의 일대기를 소설과 영화로 구상한 작품이다. 구한말 식민통치를 피해 만주로 건너간 차학경의 외조모, 그의 딸인 차학경의 어머니 삶을 토대로 만들었다. 그의 대표작인 ‘딕테’(1982년)는 아트북 형태의 작품인데 잔 다르크, 유관순, 차학경, 차학경의 어머니 등 여러 여성들이 화자로 등장한다. 영어, 한국어, 중국어 등 혼합된 언어와 시, 사진, 지도 등이 뒤섞여 다언어와 다문화를 경험하는 이주여성의 계보와 서사를 드러낸다.
김현주 교수(가운데)는 아시안 아메리칸 예술가들을 연구하다 1998년 ‘테레사 학경 차’(차학경)를 처음 접했다. 국내에서는 차학경 연구의 선발주자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어느 시대건 늘 있었죠. 하지만 그 고민이 주목을 받느냐 아니냐에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시기는 주변부 목소리가 나올 통로가 보다 다양합니다. 이전에는 주요 미술관·갤러리 전시에 포함돼야 존재를 드러낼 수 있었다면, 이제는 자신을 표면화시킬 수 있는 매체와 커뮤니티가 많이 분화되어 있죠. 이런 시대가 차학경을 다시 불러낸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 차학경은 어떤 사람일까. 김 교수는 “삶을 즐겁고 단순하게 살아가던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심오한 쪽에 가깝다. 진지하게 삶에 대한 철학을 예술로 통합하려 했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그런 차학경의 삶과 작품을 통해 지금 고민해볼 수 있는 것으로 ‘한국성’을 말한다.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한국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죠. 그렇다면 한국성이라는 개념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은 곧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가 보자는 말입니다. 타자의 삶을 알아야 나라는 존재를 더 잘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차학경, 치환, 미국, 1976, 11분 40초, 흑백, 무성.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Courtesy Electronic Arts Intermix (EAI), New York.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서울 MMCA영상관에서 다음달 18일까지 ‘영화로, 영화를 쓰다’ 프로그램을 통해 차학경의 ‘비밀스런 유출’, ‘입에서 입으로’, ‘치환’, ‘비데오엠’, ‘다시 사라짐’을 상영한다. 차학경 외에도 이란의 포루그 파로흐자드, 베트남계 프랑스 예술가 마르그리트 뒤라스, 미국 수전 손택의 작품이 상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