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재인 전 대통령이 1일 재임 중 벌어진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건 ‘안보 정쟁화, 안보 체계 무력화’라고 했다.
# 민노총은 총파업을 발표했다. 언제? 2월 10일 정기대의원대회에서 화물연대 사태를 예견한 듯 9월 말·10월 초 총파업을 의결한 거다.
# 전국역사교사모임 소속 교사 1191명이 지난달 28일 중고교 역사책 속의 ‘자유민주주의’ 표기에 반대한다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11월29일 민주노총 소속 화물연대 서울경기지역본부 조합원들이 파업 결의대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세 장면은 일견 서로 관련 없는 별개의 사건 같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 때 한번 ‘성공의 맛’을 본 이념과 체제 전복의 고리로 연결돼 있다는 점에서 한 몸이다. 2008년 3·1절 기념식에서 “이제 이념의 시대는 갔다”고 이명박(MB) 당시 대통령은 연설했다. 착각이었다. MB를 증오한 좌파는 그로부터 두 달도 안 돼 광우병 소고기 괴담을 퍼뜨리며 촛불시위를 벌였다. 윤석열 정부는 같은 수렁에 빠지지 않겠다는 교훈을 얻은 듯하다.
● “이념의 시대는 갔다”는 착각
문 전 대통령은 재임 당시 우리 공무원이 피살되기 3시간 전 북한 해역에서 표류 중임을 보고받고도 어떤 지시도 하지 않았다. 그때 TV에선 사전 녹화된 ‘한반도 종전선언’ 유엔 연설이 방송되고 있었다. 한반도 종전선언은 2007년 10월 노무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이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했던 10·4공동선언 주요 내용 중 하나다. 노무현이 못했던 종전선언과 주한미군 철수 등 후속 조치, (북핵과 동행하는 불안한) 평화체제를 이뤄내는 것이 문재인으로선 ‘남쪽 국민’의 생명보다 더 중요했다는 얘기다.
문재인 대통령이 2020년 9월22일 오후 청와대에서 제75차 유엔 총회 기조연설을 영상으로 전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화물연대는 2003년에도 ‘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 구호를 내걸고 파업을 벌였다. 올해와 같은 구호다. 문 전 대통령은 2011년에 쓴 ‘운명’에서 “화물연대가 파업에 이르기까지 정부 대응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남의 일처럼 논평하고는(그때 그는 민정수석이면서 노동문제도 담당했다) “결국 파업은 합의 타결됐다. 사실은 정부가 두 손 든 것”이라며 “노정(勞政)관계는 첫 단추부터 잘못 채워진 측면이 있다”고 고백했다.
그런 민노총에 ‘지분’을 주고 집권한 것이 문 정권이었다. 이미 올 2월 민노총은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연말 총파업 벌일 것을 의결한 바 있다. 위원장 양경수는 내란선동 등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고 복역한 이석기 전 통진당 의원과 같은 ‘경기동부연합’ 출신이다. 11월 호주 국제노총 세계총회 참석해 “체제전환을 위해 필요한 것은 행동”이라고 기조연설 했다. 쉽게 말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거다.
● 민노총이 꿈꾸는 ‘미국 없는 체제’
3일 민노총은 서울 여의도 국회 앞과 부산신항에서 화물연대 총파업에 힘을 싣기 위한 전국노동자대회를 열었다. ‘가자, 총파업’, ‘단결 투쟁’이 적힌 붉은 머리띠를 메고 “화물안전 운임제 확대하라” “업무개시 명령 철회하라!”를 외쳤지만 기세는 전 같지 않다. 6일로 선포한 총파업이 과연 이뤄질지도 미지수다.
연초 민노총이 내다본 2022년 세계정세는 ‘2008년 미국발 세계금융위기를 거치며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종주국인 미국 패권의 악화’가 출발점이었다. 미국이 저무는 해로 바뀌면서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의 패권을 허용치 않는 신냉전 체제가 들어서고 있다고 본다. 중-러, 이란 북한에 남미의 핑크타이드까지 등 반미전선이 다층화되는 상황에 윤석열 정부가 한미 가치동맹을 맺은 것은 중-러 봉쇄령에 돌격대로 앞장서는 것과 같다는 분석이다.
그런데 어쩌나. 미국이 저무는 해로 바뀌었다는 건 좌파의 오랜 바람일 뿐이다. 한동안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이 2020년대말 미국을 추월한다는 ‘중국몽’이 유행했지만 제로 코비드 정책에서 보듯 공산당 독재와 억압정치는 중국 발전의 장애물로 드러나고 있다. 중국의 미국 추월은 21세기 중반까지도 어려울 것이라는 ‘깨몽’이 이어진다. 호주 로위연구소, 미국의 경제학자 로런스 서머스에 이어 최근엔 록펠러 인터내셔널의 루치르 샤르마 회장이 경종을 울렸다. 중국의 인구·부채·생산성 등 지표를 종합한 중국의 성장 잠재력이 떨어지면서 시진핑 국가주석이 3연임하며 큰소리친 대로 2035년까지 중진국이 될지도 의문이라고 지난달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에 썼다.
민주노총이 5월 홈페이지에 공개한 전국노동자대회 교육 교안 <윤석열 정권 출범, 정세와 투쟁 방향>중 47페이지. “역사적 반동을 엎을 더욱 광범위한 사회연대투쟁전선을 구축”해야 한다고 썼다.
● 인민민주주의로 통일돼도 괜찮다는 건가
미국 패권시대는 이미 끝났다는 판단 아래 자본주의 체제 전환을 외치는 민노총의 전략은…실패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민노총 같은 정세판단을 하는 세력이 민노총뿐이냐는 점이다. 문 전 대통령 때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삭제하려 했던 헌법 개정안이, 그리고 결국 삭제했던 역사교과서가 섬뜩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2018년 2월 더불어민주당은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안을 당론으로 채택하기 전, 제4조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통일 정책’을 ‘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통일 정책’으로 고친다고 발표했다가 철회했다. 믿고 싶진 않지만 북한식 인민민주주의로 통일이 돼도 상관없다는 뜻인지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비슷한 일은 역사 교과서에서 고스란히 반복됐다. 고교 한국사 교과서의 상당수가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하면서 북한은 미화한 사실이 2004년 국회 국감에서 드러났다. 좌파 학계와 교육계, 지금의 민주당 반발로 그때 못 고친 것을 2011년 MB정부 때 고쳤다. 대한민국 정체성과 관련된 ‘민주주의’ 표기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꾼 거다. 2018년 문 전 대통령은 교육과정 집필기준에서 ‘자유’를 빼버렸다. 개헌에서 못 이룬 한을 푼 것 같다. 윤석열 정부가 그걸 되살리는 ‘2022 개정 교육과정’ 행정예고를 하자 똑같은 반발이 일어났다.
12월6일 예고된 전국동시다발 민주노총 총파업 총력투쟁대회 안내 포스터. 민주노총 홈페이지.
● 자유민주주의 실천으로 모범 보이길
“21세기 냉전의 핵심은 이념과 체제”라고 이상우 신아시아연구소 이사장은 한 인터뷰에서 밝혔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세계질서에 대한 러시아의 도전이었다. 민노총 같은 좌파는 푸틴의 승리를 점친 모양이지만 인권과 자유, 법치 등의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세계의 연대를 거스를 순 없다.
1948년 대한민국은 서로 다른 정체성을 추구하는 정치사회 세력의 갈등을 극복하고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채택했다. 좌편향 교과서들은 김구 김규식의 좌우 합작운동을 비중 있게 서술하며 마치 ‘가지 않은 길’이 있었던 것처럼 아이들을 현혹한다. 그러나 김규식의 비서였던 송남헌은 평양행에 앞장섰던 김규식의 또 다른 비서 권태양이 북측의 간자(間者)였음을 1995년에야 알았다고 ‘송남헌 회고록-우사 김규식과 함께 한 길’에 썼다. 만에 하나, 지난 좌파 정권에북의 세작 또는 공작이 있었음이 몇십 년 후에 밝혀질지 모를 일이다.
MB정부처럼 중도주의로 끝내면 또 반복될 수 있다. 윤석열 정부의 확고한 대응이 필요한 이유다. 민노총 총파업에, 북한의 도발에, 좌파가 걸어온 체제전쟁에 정부가 말로만 법과 원칙만 외치는지 아니면 자유민주주의 실천으로 모범을 보이는지 지켜볼 일이다.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