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표’ 업무개시명령제 약효? 尹, 원칙과 대화로 파업 종결짓고 노동개혁 입법 서둘러 ‘기울어진 운동장’ 바로 세워야
천광암 논설실장
미국 서부 항만 물류를 장악하고 있는 국제항만창고노조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견줄 만큼 막강한 독점적 지위와 위세를 자랑한다. 미국 총수입물량의 40%가량이 이곳을 통과하다 보니 가벼운 분규 시늉만 해도 미국 경제가 경기(驚氣)를 일으킨다. ‘부두의 귀족들(Lords of Docks)’이 노조원들의 별칭이다. 이런 항만노조도 두려워하는 게 하나 있다. 파업이 국가 경제·안보를 위협할 경우 대통령이 법원 허가를 받아 노동자의 직장 복귀를 명령할 수 있도록 한, 이른바 직장복귀명령제다. 2002년 항만노조의 파업이 길어지자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이 명령을 발동해 사태를 종결지었다.
윤석열 정부가 이번 화물연대 파업에서 사상 처음으로 발동한 업무개시명령의 원조가 이것이다. 이 제도가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은 2002년 미 서부 항만파업이 있었던 그 다음 해, 노무현 정부에서다. 이런 연관 고리 외에도 화물연대의 파업에는 윤 대통령과 노 대통령 간에 묘한 공통점이 보인다. 취임 후 처음으로 맞닥뜨린 초대형 이슈가 화물연대 파업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평행이론을 연상시킬 정도다.
2003년 5월 화물연대 포항지부의 파업이 시작되자 노 정부는 허둥지둥했다. 미국을 방문 중이던 노 대통령이 파업 진행 상황을 챙기기 위해 청와대로 전화를 했으나 당직자들이 잠을 자느라 전화를 안 받는 해프닝까지 있었다. 준비 안 된 노 정부는 화물연대에 백기투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계는 기세가 올랐다. 곧이어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도입에 반발하는 전교조의 연가투쟁 선언이 터져 나왔다. 이런 배경에서 나왔던 게 “대통령을 제대로 못해 먹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발언이었다.
윤석열-노무현 평행이론은 여기까지다. 윤 대통령의 경우는 아직 취임 후 200여 일이 지났을 뿐이다. 나머지는 가능성의 영역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노사관계에 관한 한 노 대통령보다 훨씬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경제의 성장 잠재력이 과거에 비해 크게 떨어진 데다, 문재인 정부 5년간 노사관계가 노동계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이 됐기 때문이다.
문 정부는 2020년 12월 해고자와 실직자의 노조 가입을 허용하고 노조전임자의 급여 지급을 허용하는 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이어 지난해 4월 노동자의 권리를 크게 강화하는 국제노동기구(ILO) 핵심 협약 3개를 추가로 비준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ILO 핵심 협약 8개 중 7개를 비준한 나라가 됐다. 제조업 경쟁관계에 있는 미국 중국 일본보다 수가 많은 것까지는 그렇다고 칠 수 있다. 심각한 문제는 ‘파업 시 대체 근로 허용’ 등 노사관계의 균형을 잡기 위한 경영계의 요청은 깡그리 무시됐다는 점이다.
이런 가운데 강경투쟁의 선봉에 선 민노총은 문 정부의 친노조 정책을 업고 급속하게 세를 불렸다. 잦은 파업과 생산 손실은 고질병이 됐다. 임금근로자 1000명당 연평균 근로손실일수는 일본의 100배가 넘는다.
신발 속에 이렇게 큰 ‘돌덩이’를 넣어 둔 채로는 윤 대통령이 규제혁신전략회의를 백날 열어 봐야 성장 엔진이 되살아나지 않는다. 대화가 필요할 때는 대화로, 원칙을 세워야 할 때는 원칙으로 우선 눈앞의 민노총 총파업 공세를 헤쳐 나가야 하겠지만 그것은 끝이 아닌 시작일 뿐이다. 정작 중요한 윤 대통령의 과제는 입법을 통해 기울어진 운동장을 근본적으로 바로잡는 것이다. 여소야대라는 여건상 당장의 입법이 어렵다면 최소한 내후년 총선에서 핵심 공약으로 내놓고 유권자의 판단을 물어볼 수 있는 준비를 지금부터 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