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소송에 발목잡힌 반도체] 韓 PSK, 장비 개발 성공하고도 美 램리서치 소송에 납품 어려움 해외기업 6곳 국내특허 1년새 31%↑
국내 반도체 장비 기업인 피에스케이(PSK)는 지난해 반도체 제조 과정에서 불량률을 크게 낮춰주는 장비를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지만 돌연 특허소송에 휘말려 납품에 애를 먹고 있다.
이 회사가 개발한 장비는 반도체 핵심 재료인 얇은 원형 판 모양 웨이퍼 가장자리의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베벨 에처’다. 불량률을 낮춰 수율을 높여주는 핵심 장비다. 수율은 반도체 제조 공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이 분야 1등 기업인 미국 램리서치는 PSK가 자사 특허를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PSK는 램리서치의 특허 6건에 대해 특허성을 부정하는 심판을 특허청에 제기해 대응했다. 특허청은 이 중 3건에 대해 특허 효력이 없다고 판단했고, 1건은 아직 결론을 내지 않았다. 하지만 2건은 특허를 인정했다. 현재 양사 간에 진행 중인 특허소송에서 이에 대한 침해 여부가 주요 쟁점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문제는 특허소송에 휘말리면서 PSK 제품 생산 및 납품에 어려움이 커졌다는 점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일단 소송에 걸리면 기업들이 해당 제품 사용을 꺼릴 수밖에 없다”며 “결론이 나기 전까지 계약 지연으로 공급 차질을 빚고 매출 타격을 떠안게 되는 구조”라고 말했다.
“해외 반도체사, 특허성 없어도 韓에 소송 공세” 장비 국산화 막아
해외기업들, 국내기업 견제 강화
“美-日 등 업체들 무차별 특허 소송
한국 기업 시장진입 조기차단 의도”
심사관 1명이 1년에 197건 특허처리
전문가 “심사역량 키워 분쟁 줄여야”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패권 경쟁으로 시작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주도권 다툼이 세계 각국에서 날로 치열해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국에 대한 글로벌 기업들의 반도체 특허 공세 수위가 높아지는 현상을 특별히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 “국산화 발목 잡는 특허 공세”
국내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들은 해외 기업들의 국내 특허가 급증하는 배경에는 단순히 독자적인 기술을 보호받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국내 반도체 산업의 국산화와 경쟁 기업의 성장을 견제하기 위한 의도가 있다고 본다. 특허의 범위를 광범위하게 내는 등 특허성이 있다고 인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주장도 나온다. 특허성은 없는 기술을 새로 만들었거나(신규성) 기존 기술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차별성(진보성)이 있는지 여부로 판단한다. 국내 특허청에서 특허 무효 청구가 받아들여지는 비율은 50%에 육박한다. 박재근 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은 “해외 기업들이 국내에서 특허를 광범위하게 내다 보니 국내 업체가 뛰어드는 순간 특허에 막히는 사례가 많다” 고 말했다.
반면 램리서치의 소송대리인인 김앤장 측은 “PSK에서 무효 청구했다가 유효로 판단받은 특허 2건이 핵심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유리한 지위를 확보했다”며 “특히 그중 1건은 램리서치가 한국 기업으로부터 사용권을 사들인 기술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 특허 등 해외 기업 견제에 취약한 K반도체 공급망
이 같은 해외 기업의 공세가 한국 반도체 산업에 위기감을 드리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93년 삼성전자가 메모리 반도체 세계 1등으로 올라섰을 때 미국, 일본 기업들이 강한 견제에 나섰다. 국내 기업들은 장비 수급에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삼성전자는 PSK를 비롯해 국내 반도체 소재 장비 기업들에 제안해 소재·장비 국산화를 위한 공동 연구·개발에 나섰다. 이후 PSK는 2007년 웨이퍼 찌꺼기를 제거하는 ‘애셔’ 부문 세계 1위로 올라섰다. 이 분야 역시 글로벌 시장에서 램리서치와 선두를 다투는 분야다.
2019년에는 일본이 정치적 갈등을 이유로 고순도 불화수소(식각에 쓰이는 에칭가스)와 극자외선(EUV)용 포토레지스트(웨이퍼 회로 소재) 등 반도체 공정 핵심 소재를 한국에 수출하지 못하도록 규제했다. 모두 일본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소재였다. 이후 정부와 기업의 국산화 노력으로 소부장 대일(對日) 의존도가 2018년 18.3%에서 지난해 15.9% 줄었지만 여전히 미국, 유럽, 중국 등 해외 의존도가 높아 공세에 취약한 상황이다.
○ “특허 공세 등에 대응 역량 키워야”
심사관 업무를 유연하게 해 반도체 등 특수 분야 심사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특허청은 반도체 분야 특허출원을 우선 심사하는 제도를 11월부터 시행했다. 보통 10개월 걸리는 심사를 2∼3개월 안에 마치는 제도다. 박 학회장은 “4차 산업혁명 분야나 분쟁이 심해지는 시장을 위주로 집중 심사하는 등 특허의 질을 높여야 한다”고 했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측은 “국내 소부장 기업이 후발주자이다 보니 원천특허는 주로 해외 기업이 갖고 있고 국내 기업은 개량특허 중심”이라며 “그만큼 분쟁에 취약할 수밖에 없고 글로벌 기업과의 소송이 늘어나면 우리 기업들의 영업에 심각한 차질이 발생할 것”이라고 했다. 양 의원은 “글로벌 기업과 특허소송에 휘말리면 당장에 거래가 중단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국내 소부장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특허 대응 역량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현익 기자 bee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