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선한 ‘코인 천재’로 알았다… FTX에 뒤통수 맞은 큰손들[글로벌 포커스]

입력 | 2022-12-10 03:00:00

美투자가들이 FTX에 몰렸던 까닭은
EA활동하며 테크산업 인맥 쌓고 김치프리미엄 착안해 큰돈 벌어
2019년 홍콩에 거래소 FTX 설립… 수익 50% 기부해 ‘선한 영향력’
로스쿨 교수 부모 인맥도 한몫… ‘제2 아마존’ 초기 투자 꿈꾸며





美-日큰손들, 왜 FTX 창업자에 꽂혔나올해 전 세계에 충격을 안긴 세계 3위 가상화폐 거래소 FTX의 허무한 파산과 ‘괴짜 천재’로 비친 샘 뱅크먼프리드의 몰락. 불과 1년 전 미국, 일본의 벤처캐피털 거물들은 왜 앞다퉈 이 스물아홉 살 청년에게 투자하려 했을까.

FTX 창업자 샘 뱅크먼프리드는 가상화폐 시장의 미래를 이끌면서 많은 단체를 후원해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며 공격적으로 홍보 활동을 벌였다. FTX가 “경쟁사들이 창밖을 내다보면 이런 전망이 보일 것”이라며 트위터에 올린 사진. 사진 출처 FTX 트위터 



《“이럴 수가, FTX가 투자자를 모집한다고 합니다. 당장 오후 일정을 취소하세요!”

2021년 7월 미국 실리콘밸리, 권위 있는 벤처캐피털 세쿼이아 투자 심사역들은 반가운 소식에 마음이 들떴다.

황금 같은 금요일 오후 4시였지만 부랴부랴 투자 설명회 자리를 마련했다.

당시 가상화폐 시장에서 두각을 드러내던 거래소 FTX에 투자할 수 있는 기회였다. 29세 창업 2년 차 FTX 창업자 샘 뱅크먼프리드가 화상회의 플랫폼 줌 화면에 나타났다.

“가상화폐 거래소 FTX 비전은 ‘슈퍼 앱’입니다.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거래할 수 있는 곳이죠. 세계 어디서든 비트코인뿐 아니라 어떤 형태의 화폐라도 송금하고 거래할 수 있는 곳. FTX 세계에서는 당신의 돈으로 뭐든 할 수 있어요.”

세쿼이아 채팅방에는 “10점 만점에 10점이다” “나는 이 창업자를 사랑해!” “예스!!!!”라는 흥분에 찬 반응이 오갔다.

곧 2억1400만 달러(약 2800억 원) 투자가 단행됐다. 대규모 투자 결정이 내려지던 동안 뱅크먼프리드는 ‘리그 오브 레전드’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는 여유로웠다. 세쿼이아뿐 아니라 소프트뱅크 블랙록 타이거펀드를 비롯해 해외 거물 투자사들이 줄 서서 투자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투자 설명회를 할 때도 게임을 즐기는 여유로움, 무심한 옷차림, 명문 매사추세츠공대(MIT) 출신,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이상….

그는 실리콘밸리가 원하는 ‘천재 괴짜형’에 부합했다. 그는 곧 ‘제2의 워런 버핏’, ‘제2의 JP 모건’이란 별칭을 얻었다. 》



○ 글로벌 큰손 투자가들이 줄 선 FTX
이 FTX 투자 결정 일화는 구글 유튜브 엔비디아를 발굴한 세계 최강의 벤처캐피털 세쿼이아 홈페이지에 오른 내용이다. 지난달 FTX가 파산하고, 창업자 뱅크먼프리드가 금융범죄혐의로 조사를 받는 신세가 되자 이 글은 삭제됐다. 세쿼이아는 당시 투자한 2800억 원을 손실 처리했고, 투자자들에게 사과 편지를 보내 앞으로 엄격하게 실사를 하겠다고 밝혔다.

기업가치 320억 달러(약 42조 원)에 달했던 FTX는 지난달 10일 미 델라웨어법원에 파산보호신청을 했다. FTX 자체 코인을 발행해 가치를 부풀렸고, 분식회계 의혹 속에 뱅크런(대규모 고객 인출 사태)이 일어났다. 그 와중에 고객 자금을 유용한 단서가 나와 미 규제 당국과 맨해튼검찰청 등이 사기 혐의 등을 조사 중이다. 파산보호신청 후 영입된 구조조정 전문가 존 레이 신임 최고경영자(CEO)가 “40년 구조조정 경력 중 이처럼 완전한 기업 통제 실패를 본 적이 없다”고 비판할 정도로 회사가 허술하게 운영된 정황이 속속 나오고 있다.

피해 규모 산정조차 어려울 만큼 엉망이라는 FTX는 어떻게 미 벤처업계 큰손들이 줄을 서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 ‘김치프리미엄’ 착안해 큰돈 만진 천재
1992년생 뱅크먼프리드는 실리콘밸리에서 나고 자랐다. 부모는 둘 다 실리콘밸리 인재 산실인 스탠퍼드대 로스쿨 교수다. 이 지역 명문 사립고를 거쳐 MIT(수학·물리학 전공)를 졸업한 후 4년 동안 뉴욕 월가 투자은행 ‘제인스트리트’에서 상장지수펀드(ETF) 담당 트레이더로 일했다.

이 시기에 피터 싱어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가 시작한 ‘효율적 이타주의(EA·Effective Altruism)’ 운동에 빠지게 된다. 뱅크먼프리드는 모든 것을 그만두고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실리콘밸리 일대 EA 모임에서 활동했다. 이때부터 테크 산업 주요 인사들과 인연을 맺었다. 가상화폐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EA 모임에서 자주 화제에 올라서였다고 한다.

“미국에선 비트코인 가격이 1만 달러인데, 한국에선 1만5000달러인 걸 봤어요. 한국에서 가상화폐가 더 비싼 김치프리미엄을 알게 됐죠. 이건 길바닥에서 5000달러를 그냥 벌 수 있는 기회인 거잖아요.”

올 4월 FTX 주최 행사에 참석한 샘 뱅크먼프리드 창업자와 슈퍼모델 지젤 번천. 사진 출처 FTX 트위터

그는 여러 인터뷰에서 우연히 알게 된 김치프리미엄이 사업의 출발점이었다고 말했다. 전통적 금융시장에선 동일자산 가격 차이를 활용한 차익거래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예컨대 삼성 주식을 사려면 전 세계 어디서나 동일한 가치를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가상화폐는 국가마다 규제가 달라 가격이 달랐고, 특히 한국 일본은 수요가 급등해 비트코인 값이 미국보다 비쌌다.

뱅크먼프리드는 차익거래를 결심하고, 달러와 원화를 환전해가며 돈을 벌려고 했다. 하지만 수십만 달러어치 원화를 달러로 마음껏 바꾸기엔 한국 환전 규제가 강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대안으로 차익거래 타깃을 규제가 덜한 일본으로 정했다. 미국에서 산 비트코인을 일본에서 팔아 수익을 남기고, EA 커뮤니티에서 알게 된 일본 유학생이 일본에서 남긴 수익을 미국으로 가져오게 했다. 그가 2017년 창업한 알라메다리서치는 그렇게 초기 자본 5만 달러로 매일 10%씩 수익을 얻었다(일본의 스시프리미엄은 약 10%였다). 알라메다 창업 공신들도 페이스북을 비롯한 테크 기업 출신 EA 지인들이었다.

돈을 더 넣으면 막대한 돈을 벌 게 뻔했다. 초기 투자금 5000만 달러(약 660억 원)의 상당 부분은 EA에서 알게 된 스카이프 공동 설립자 얀 탈린이 선뜻 내줬다.
○ ‘천재 괴짜’에 ‘선한 영향력’ 명성

알라메다에서 돈을 충분히 번 뱅크먼프리드는 2019년 가상화폐 거래소 FTX를 규제가 덜한 홍콩에 설립했다. 가상화폐 거래가 활발한 중국과 가까운 것도 이점으로 봤다. 그는 알라메다 수익의 50%를 EA가 지정한 자선단체에 기부하며 명성을 쌓았다.

마침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 시기 유동성 과잉은 FTX에 날개를 달아줬다. 2020년 비트코인 거래 가격은 300%, 이더리움은 450% 상승했다. 안전자산 금은 ‘고작’ 25% 상승에 그쳤다. 2021년 미 투자사들은 가상화폐 시장에 투자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다른 투자사와 경쟁도 치열해 다들 마음이 급했다.

하지만 이른바 ‘코인 판’은 투기꾼과 사기꾼이 워낙 많아 옥석을 가리기 어려웠다. 세쿼이아가 올린 ‘투자기(記)’에 따르면 이들은 모든 가상화폐 거래소 창업자를 만났다. 믿음이 가는 이를 만나기 어려웠고, 괜찮다 싶으면 이미 기업공개(IPO)에 성공한 후였다.

“샘은 달랐다. (FTX 본사는 홍콩에 있어) 규제 위험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의 부모는 둘 다 변호사다. 뉴욕 월가 투자은행에서 트레이딩 경력도 있었다.”

투자하고 싶은데 조건에 딱 맞는 기업. 그게 FTX였다. 부스스한 차림으로 사무실에 누워 있는 뱅크먼프리드 모습은 실리콘밸리가 원하는 이미지였다. 그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와 나란히 포럼에 나설 때에도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이었다.

실리콘밸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이자 ‘더 코드: 실리콘밸리와 미국의 재건’을 쓴 마거릿 오마라 워싱턴대 교수는 뱅크먼프리드가 ‘위즈키드(Whiz-kid·천재형 인물)’의 전형이라고 말했다. 오마라 교수는 동아일보에 “실리콘밸리 투자자들은 젊고, 부스스하며 기술이 뛰어난 인물에 ‘베팅’해왔다. 뱅크먼프리드의 그런 면모는 투자자를 모으는 데 일조했다”고 말했다.

실리콘밸리 이전에도 미국은 ‘기술이 뛰어난 부스스한 인물’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한다. 피뢰침을 발명한 벤저민 프랭클린이 1770년대 프랑스 궁정에 갔을 때 엉망진창 옷차림에 귀족들이 놀랐다거나, 토머스 에디슨 발명 일화 등이 회자되며 천재형 괴짜에 대한 믿음이 커져왔다는 것이다. 현재 미국 경제를 이끄는 이른바 FAANG(페이스북 애플 아마존 넷플릭스 구글)은 모두 기술 중심 창업자가 만든 회시다.

뱅크먼프리드가 EA를 바탕으로 ‘선한 영향력’을 강조해온 점도 투자자 마음을 샀다. 오마라 교수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독점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나 마크 저커버그 메타 창업자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 젊고, 선한 이상을 가진 천재형 인재를 원하고 있다는 의미다.

뱅크먼프리드는 부모 인맥 덕도 상당히 봤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사업 초창기 그의 부모가 1000억 달러를 운용하는 사모펀드 토마브라보 투자를 이끌어왔다고 보도했다. 공동창업자인 올랜도 브라보는 그들의 스탠퍼드대 제자였고, FTX를 세상에 알리는 치어리더 역할을 했다고 FT는 전했다.

권위 있는 벤처캐피털이나 억만장자의 투자를 받으면 그 다음은 순탄하다. 누구나 ‘제2의 아마존’, ‘제2의 구글’ 초기 투자자가 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FTX 투자사 가운데는 삼성넥스트도 포함돼 있었다. 투자 기준이 까다로운 싱가포르 국부펀드, 캐나다 온타리오주 교원연금도 FTX에 투자했다. 무엇보다 10년 이상 지속된 저금리로 시중에 자금이 넘쳤다. 투자 적격성을 엄격히 따지다 투자를 못 하면 바보가 될 정도의 과열이었다.
○ 뱅크먼프리드 처벌할 수 있나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샘 뱅크먼프리드 FTX 창업자(왼쪽부터)가 올해 4월 FTX 주최로 바하마에서 열린 ‘크립토 바하마‘ 행사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 출처 바하마프레스 트위터 

오마라 교수는 바이오 스타트업 테라노스 창업자 엘리자베스 홈스의 사기가 성공한 것도 미국의 이 같은 투자 문화가 바탕이 됐다고 말한다. 홈스는 ‘제2의 잡스’로 불리며 1조2000억 원 이상 투자를 받아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테라노스는 손가락에서 채취한 혈액 몇 방울로 암을 포함한 250여 개 질병을 진단할 수 있는 획기적인 기기를 개발했다고 주장했다.

홈스가 막대한 투자를 받았던 것은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을 비롯한 미 상류사회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타고난 말솜씨, 바이오 기술에 대한 믿음, 스티브 잡스를 따라 입는 패션 스타일에 억만장자 디보스 가문이 투자를 결정했다. 머독, 오라클 창업자 래리 엘리슨, 월마트 창업자 상속녀 앨리스 월턴 등도 투자해 테라노스 기업가치는 한때 90억 달러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홈스는 사기 혐의로 징역 11년을 선고받았다.

‘FTX 제국’을 세운 뱅크먼프리드도 형사 처벌을 받게 될지 관심이 쏠린다. 그는 민주당 기부액 순위 2위에 오를 정도로 번 돈을 정계에 투자해 정계뿐 아니라 미 규제 당국과도 인연을 쌓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각에선 그를 2008년 대규모 폰지사기(다단계 금융사기)가 발각된 버니 메이도프와 비교한다. 투자를 받아 자체 발행 코인을 계속 띄워야 기업가치를 올릴 수 있는 구조가 폰지사기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FTX에 예치된 고객 자금을 계열사 알라메다로 이전한 것은 사기 및 횡령 혐의가 짙다는 것이 미 법조계 시각이다.

하지만 사기 행각으로 곧바로 체포된 메이도프와 달리 뱅크먼프리드는 검찰이 기소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FTX 본사가 바하마에 있고 뱅크먼프리드도 바하마에서 돌아오지 않고 있어 증거나 증언 확보에 제약이 있다. 그를 미국으로 강제 송환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인다.

투자자 손실 보전 방법도 마땅치 않다. FTX 담보 채권자 상위 50명에게 갚아야 할 부채 규모만 31억 달러(약 4조362억 원)에 달한다. 뱅크먼프리드는 뉴욕타임스(NYT), 월스트리트저널(WSJ), FT 등 세계 주요 언론과 잇달아 인터뷰하며 자신의 논리를 강조하고 있다.

“투자자들에게 죄송하다. 다 내 잘못이다. 그러나 사기는 아니고 실수일 뿐이다.”



뉴욕=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